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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삼국지 - 정사 "이엄전"

삼국지 Ⅸ의 이엄(이평)

삼국지 Ⅸ의 이엄(이평)



촉의 이엄(이평)에 대한 글입니다. 상당히 좋은 평을 받은 인물이었으나 한번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거짓 보고)로 쓸쓸히 초야에서 생을 마감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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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엄은 자가 정방이고, 남양군 사람이다. 젊었을 때 군의 관리가 되었고, 잭산으로 인하여 칭찬받았다. 형주목 유표는 그를 차견하여 여러 군현의 장을 역임하도록 했다. 조조가 형주로 진입했을 때, 이엄은 자귀현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서쪽의 촉나라로 달아났다. 유장은 그를 성도의 현령으로 임명했고, 그는 또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건안 18년(213)에 이엄을 호군으로 임명하여 면죽에서 유비를 막아내도록 했다. 그런 이엄은 병사들을 이끌고 유비에게 투항했다. 유비는 이엄을 비장군으로 임명했다. 성도가 평정된 후, 건위태수, 흥업장군으로 임명 되었다.

23년(218)에 도적 마진, 고승등이 처에서 모반하여 수만 명을 모아 자중현으로 진격했다. 그 당시 유비는 한중에 있었고, 이엄은 다시 병사를 징발할 수 없었다. 단지 그 군의 병사 5천 명을 이끌고 토벌하러 가서 마진과 고승등의 머리를 베었을 뿐이다.

잔여세력들은 뿔뿔이 흩어져 전부 민적으로 회복되었다. 또 월수 만족의 우두머리 고정이 군대를 파견하여 신도현을 포위하자, 이엄은 기병을 이끌고 달려가 구원하여 적은 모두 달아났다. 보한장군의 관직을 더했으며, 건중군을 관리하는 것은 이전과 같았다.

장무 2년(222)에 유비는 이엄을 불러 영안궁까지 오도록 하여 상서령으로 임명했다. 3년(223)에 유비의 질병이 악화되자, 이엄은 제갈양과 함께 어린 유선을 보좌하라는 유조를 받았다. 이엄을 중도호로 임명하고 안팎의 군사를 통솔하며 영안에 주둔하도록 했다.

건흥 원년(223)에 도향후로 봉하고 가절로 삼고 광록훈을 더했다. 4년(226)에 전장군으로 전임됐다. 제갈양은 한중으로 출병하려고 하면서 이엄이 반드쉬 뒷일을 맡아 줄것으로 생각하고 강주로 옮겨 주둔시키고, 호군 진도를 남겨 영안에 주둔시켜 모두 이엄의 통솔하에 두었다. 이엄은 맹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말했다.

저는 제갈공명과 함께 유비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책임이 막중한 것이 걱정입니다. 좋은 동반자를 얻고 싶습니다.

제갈양 역시 맹달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일을 처리하는 것이 마치 물흐르듯하여, 해야할 일과 버려야 할일을 결정할때 주저함이 없는 것이 정방의 성격입니다.

이엄이 귀하게 존중받는 것은 이와 같았다.

8년(230)에 표기장군으로 승진했다. 조진이 세 갈래 길로 나누어 한천으로 진격해 왔으므로, 제갈양은 이엄에게 2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한중에 가도록 명령했다.

제갈양은 표를 올려 이엄의 아들 이풍을 강주도독독군으로 임명하고, 이엄의 후방 일을 담당하도록 했다. 제갈양은 다음해 출병을 확정짓고 이엄에게 중도호의 신분으로 승상부의 일을 맡도록 명령했다. 이엄은 이평으로 개명했다.(이엄=이평)

9년(231) 봄에 제갈양의 군대는 기산에 주둔하였고, 이평이 수송 업무를 재촉하며 감독했다.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계속 장마비가 쏟아져 식량 운반이 지속되지 못했으므로, 이평은 참군 호충과 독군 성번을 파견하여 그의 뜻을 설명하고 제갈양에게 후퇴하여 돌아오도록 하라고 했다. 이평은 군대가 후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거짓으로 날란체 하며 말했다.

"군량미는 아직 충분하거늘, 어찌하여 돌아옵니까?"

이평은 이렇게 하여 자기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책임을 벗어나고 제갈양이 진군하지 않은 잘못을 분명하게 나타내려고 했다. 또 유선에게 표를 올려 말했다.

우리 군대가 거짓으로 퇴각한 것은 적을 유인하여 함께 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갈양이 이평이 앞뒤로 쓴 편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공개했으므로, 이평의 잘못은 분명해지게 되었다. 이평은 힘껏 변명하고 죄를 자백하고 사죄했다. 그래서 제갈양은 이평의 일을 상주하여 말했다.

선제께서 붕어하신 이후부터 이평은 임지에서 기산을 다스리며 작은 은혜를 베푸는 일을 하기를 원했고, 자신을 지키고 명예를 추구하며 나라의 일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북방으로 출병을 하면서 이평의 병사들에게 한중을 지키도록 하려고 했습니다. 이평은 이일을 직접 하기에는 어려우며, 올 의사가 없었으므로 다섯 개 군을 주어 파주자사로 임명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작년에 신이 서쪽으로 정발나가려고 하면서 이평으로 하여금 한중을 관리하도록 했는데, 이평은 사마의 등이 관서를 설치하여 자신을 초청했다고 말했습니다. 신은 이평의 계산으로 출병한 기회를 틈타 신을 핍박하여 자신에게 이익을 얻도록 하려고 했음을 알았습니다. 이 때문에 표를 올려 이평의 아들 이풍에게 강주를 관리하도록 하고 융성한 대우를 해줌으로써 한 시기의 정무를 처리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평이 한중에 있을 대, 모든일을 그가 책임지도록 했으므로 신하들은 지위의 높고 낮음을 불문하고 모두들 신이 이평을 너무 후하게 대우한다며 질책했습니다. 그대는 국가의 대사가 아직 확정되자 못했으며 한나라 왕실이 기울어 위험하였으므로, 이평의 잘못을 문책하는 것은 그를 칭찬하는 것만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평의 마음은 영예와 이익에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지, 이평의 마음이 시비를 전도시키는 데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만일 일의 처리를 늦추게 된다면 재화와 실채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신이 민첩하지 못한 결과이며, 설며을 많이 할수록 허물은 늘어 날 것입니다.

곧바로 이평의 관직을 폐하여 서민이 되게 했으며, 재동군으로 방축시켰다.

건흥 12년(234)에 이평은 제갈양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질병이 들어 죽었다. 이평은 항상 제갈양이 자신을 다시 살려줄 것으로 기대했으며, 제갈양의 후계자는 이런 기회를 주지 않을 것임을 헤아렸기 때문에 격분하여 결국 병들어 죽은 것이다. 이풍의 관직은 주제태수에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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