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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ALK TALK!/○○⑦ 역사TALK

[인물] 삼국지 - 정사 "곽가전"

삼국지 Ⅸ의 곽가

삼국지 Ⅸ의 곽가



지략으로 보면 삼국지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곽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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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가전(郭嘉傳)

곽가는 자가 봉효이고, 영천군 양적현 사람이다.

처음에는 북방을 지나다가 원소를 만났는데, 원소의 모신으로 있었던 신평과 곽도에게 말했다.

"무릇 지혜가 있는 사람은 주군이 될 사람을 헤아려야만 백 번 군대를 일으켜 백 번 완벽하게 공명이 세워질 수 있는 것이오. 원공은 한갓 주공의 낮은 선비를 모방하려 하고, 인재를 등용하는 기틀을 알지 못하고 있소.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서단은 많으나 요령이 적고, 모략을 좋아하지만 결단력이 없어 그와 더불어 천하의 큰 난국을 구제하고 패도로서 왕업을 정하기는 어려울 것이오."

그리고는 마침내 원소를 떠났다. 이보다 앞선 시기에 영천의 희지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책략에 뛰어난 인물이므로 조조는 그를 매우 중용했지만, 일찍 죽었다.

조조는 순욱에게 글을 써서 말했다.

- 희지재가 죽은 이후로는 나와 더불어 일을 계획할 수 있는 사람이 없소. 여남과 영천에는 본래 뛰어난 인물이 많거늘, 누가 희지재를 계승할 수 있겠소?

순욱은 곽가를 추천하였다. 조조는 그를 불러 천하의 일을 논의하고, 곽가에게 말했다.

"나로 하여금 큰 일을 이룰 수 있게 할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이구나."

곽가는 밖으로 나가서 역시 기뻐하며 말했다.

"조공은 진정 나의 주공이구나!"

조조는 표를 올려 곽가를 사공군좨주로 삼았다.

조조가 여포를 정벌할 때 세 번 싸워 그를 격파하자, 여포는 퇴각하여 성을 굳게 지켰다. 그 당시 조조 군대의 사졸들은 지쳐있었으므로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잡아오려고 생각했는데, 곽가가 조조에게 급히 공격하라고 설득하여 마침내 여포를 사로잡을 수 있었다. 이 일은 <순유전>에 있다.

손책(손책)은 1천 리에 걸쳐 전선을 구축하고 강동의 주군을 거의 소유하였다.

그는 조조가 원소와 관도에서 대치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강을 건너 북방의 허도(허도)를 습격하고자 했다. 조조 진영의 모든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였는데, 곽가는 이 일을 헤아려 말했다.

"손책은 이제 막 강동을 병탄한 것이며, 그에 의해서 주살된 자들은 모두 영웅 호걸이며 주군을 위해 죽을 힘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손책은 경솔하고 대비도 없으니, 비록 백만의 군대가 있다고 해도 혼자 중원(중원)에 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만일 자객이 숨어 있다가 일어나면 단지 한 사람의 적일 뿐입니다. 제가 그를 보건대 반드시 필부의 손에 의해서 죽을 것입니다."

손책은 장강에 임하여 건너기도 전에 과연 허공(허공)이라는 자객에 의하여 죽음을 당했다.

후에 곽가는 조조를 따라 원소를 격파했다. 원소가 죽은 후에 또다시 대군을 따라 원담과 원상을 여양에서 크게 물리쳐 모두 승리했다. 여러 장수들은 승리한 여세를 몰아 그들을 크게 공격하려고 했으나, 곽가가 말했다.

"원소는 이 두 아들을 사랑했으나, 생전에 누구를 세워야 할 지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곽도와 봉기가 그의 모신이 되었지만, 반드시 원씨 형제들 사이에서 서로 다투다가 역시 서로 어그러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군대가 그들을 핍박하면, 그들 형제는 군대를 합쳐 우리와 서로 대치하게 될 것이고, 그들을 느슨하게 풀어주면 그들 형제는 다투려는 마음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남쪽으로 가서 유표를 정벌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그리고서 형세의 변화를 기다렸다가 변화가 생긴 후에 공격하면 한 번 출동으로 평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조조는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좋소"

그리고는 남쪽으로 정벌을 떠났다. 군대가 서평(서평)에 이르렀는데, 원담과 원상은 과연 기주를 차지하려고 다투고 있었다. 원담은 원상에게 패배하게 되자 달아나 평원(평원)을 지켰으며, 아울러 신비를 보내 조조에게 항복을 구했다.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 그를 구해주었으며, 마침내 업성을 공략하였고, 또 다시 남피에서 원담을 공격하자 기주는 평정되었다.㈜ 조조는 표를 올려 곽가를 유양정후(유양정후)로 봉하게 했다. 조조가 원상 및 삼군의 오환족을 정벌하려고 할 때, 부하들은 대부분 유표가 유비를 파견하여 허도를 습격함으로서 조조를 칠 것이라고 두려워하였는데, 곽가가 말했다.

"명공은 비록 천하에 위세가 진동하지만, 오랑캐들은 그가 먼 곳에 있는 것만 믿고 반드시 방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방비하지 않은 것을 틈타 갑자기 그들을 공격하면 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원소는 항상 북방 오랑캐의 민중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며, 원상 형제도 아직 생존해 있습니다.

지금 원씨가 다스리는 네 주의 백성들은 공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잠시 귀순하게 되며, 명공께서는 은덕을 더 이상 베푸시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 만일 원상을 남겨 놓고 남쪽으로 정벌하러 가시면 원상은 한족의 도움에 의지하여 다시 주인을 위해 죽음을 본받았던 신하들을 불러들이게 될 것이고, 오랑캐들이 다시 한 차례 충돌하면 한족들이 모두 호응하게 될 것이며, 이렇게 되면 오환의 선우 답돈은 또 다시 남쪽으로 중원을 넘보려는 야심을 품게 될 것이며, 제업(제업)의 야심을 이루게 되면, 아마도 청주와 기주도 우리의 소유가 아닐 것입니다. 유표는 단지 앉아서 이야기하는 세객(세객)일 뿐입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재략이 유비를 제어하는 데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유비에게 중임을 맡기면 제지할 수 없을 것이고, 유비를 하찮은 직책에 임용하면 유비는 쓸모가 없으니, 공께서 비록 나라를 비워두고 멀리 정벌하러 가더라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조조는 이 말을 듣고 드디어 떠났다. 대군이 역현(역현)에 이르자 곽가가 말했다.

"군대는 신속함을 귀하게 여깁니다. 지금 천 리나 행군하여 다른 사람을 습격하는데, 치중이 너무 많아 이로움을 얻기가 힘들며, 또한 적들이 공격소식을 듣고서 반드시 방비하게 될 것이니, 치중을 남겨두고 가볍게 무장한 병사들을 낮과 밤을 달려 충돌하게 되면 그들은 생각지도 못한 시기에 습격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조조는 곧 비밀리에 노용새(노용새)에까지 보내어 직접 선우 답돈의 용정(용정)에까지 이르게 했다. 파로(파로)의 병졸들은 조조의 대군이 갑자기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면서 맞붙어 싸웠다. 조조는 오환군(오환군)을 크게 이기고, 답돈의 머리를 베었으며, 각왕(각왕;큰 부족의 왕) 이하의 지도자를 모두 참수했다.

원상과 그의 형 원희는 요동으로 달아났다.

곽가는 깊은 통찰력이 있었고 모략(모략)을 세우는 데 뛰어났으며, 사리와 인정(人情)에 대해서는 통달했다. 조조가 말했다.

"오직 봉효(봉효;곽가의 자)만이 나의 뜻을 확실히 알 수 있소."

나이 서른여덟에 유성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질병이 심했다. 조조는 그의 질병에 관해 물어보고 여러 차례 문병을 갔다. 곽가가 죽었을 때, 조조는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매우 슬퍼하면서 순유 등에게 말했다.

"여러분들의 나이는 모두 나와 동년배지만, 오직 봉효만이 가장 젊소. 천하를 평정하는 일이 끝나, 그에게 뒷일을 부탁하려고 했는데, 중년의 나이에 요절하였으니, 이는 운명이요!"

곧 이어 천자에게 표를 올려 말했다.

- 군좨주(군좨주) 곽가는 정벌에 따라 나선지 11년이 되었습니다. 매번 중대한 논의가 있었으며 적을 만나면 변화에 대처하였습니다. 신의 책략이 결정되지도 않았을 때, 곽가는 문득 그것을 처리하였습니다. 천하를 평정하는데, 그의 모략과 공적은 높습니다.

불행하게도 명이 짧아 대업을 끝마치지 못했습니다. 곽가의 공을 거슬러 생각해 보면, 진실로 잊을 수 없습니다. 그에게 식읍을 8백호 증가시켜 주시어 이전의 것과 합쳐 1천 호가 되도록 해 주십시오."

시호를 정후(정후)라 하고, 아들 곽혁(곽혁)으로 하여금 뒤를 잇게 했다.

나중에 조조가 형주를 정벌하고 돌아올 때, 파구(파구)에서 역질을 만나 군함을 모두 태워 버리고 탄식하며 말했다.

"곽봉효가 살아 있었더라면, 나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전에 진군(진군)은 곽가의 품행이 수양되어 있지도 않고 검소하지도 않다고 하면서 비난하였고, 몇 차례에 걸쳐 조정에 곽가를 기소했지만, 곽가의 의지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으므로 조조는 곽가를 더욱더 중시했다. 그러나 조조는 진군이 정도(정도)를 견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역시 그에게도 호감을 갖고 있었다.

곽혁이 태자의 문학(문학)이 되었지만,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아들 곽심(곽심)이 뒤를 이었다. 곽심이 죽자, 아들 곽창(곽창)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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