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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 해당되는 글 25건
[유머] 싱하형 삼국지의 맹장 여포와 한판 붙다
ⓞ2ⓦ 세상사는 이야기/○○② 그냥웃어 | 2008.06.20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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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 삼국지6 에디터 총괄 + 치트 + 정보창 패치 + 이벤트 모음 + 전술 시뮬레이션 모드 엔딩 세이브
ⓞ2ⓦ TALK TALK!/○○④ 게임TALK | 2008.06.18 01:00

사용자 삽입 이미지


San6edit_01.zip


가장 많은 기능을 지니고 있는 에디터입니다. 단, 중국판용을 한글화 한 것이라 세이브, 전술 시뮬레이션 모드 편집은 안됩니다. 나머지 시나리오, 보물, 신무장 편집은 가능합니다. 출처 표기하 자유롭게 배포 가능합니다. 전기능 한글판에서 에디트 작동하도록 수정되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San6edit02.zip


세이브 파일과 신무장 파일을 편집 할 수 있는 에디터입니다. 황제 관련 된 것들을 편집할 수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San6edit03.zip


순수 국산 에디터입니다. 세이브 파일을 편집할 수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S6New_Kor_Final.rar


신무장 파일을 편집할 수 있습니다. 출처 표기하 자유롭게 배포 가능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FindSam6.zip


장수탐색기 입니다. 재야에 묻힌 장수들을 탐색 할 수 있습니다. '수색'에 유용합니다.

p.s. 위 에디터들 중 일부는 꼭 삼국지 6가 설치된 폴더에 압축해제 해주셔야 작동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삼국지6 파킷용 해킹된 실행 파일입니다. 실행하시면 정보에 '장수지도'라는 메뉴가 있을 겁니다. 장수에 대해 얼굴CG 등 자세한 정보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기존의 삼국지 6 실행파일을 교체하셔도 되고 이름을 바꿔서 삼국지 6 설치된 폴더에 넣은 후 실행하셔도 됩니다.

sam6_man_map.rar



*삼국지6 치트*

1번:교지와 남해 사이의 섬을 누르면 새로운 군주를 선택할수 있습니다.(신군주 아님)
2번:군사를 징병할때 '병과'라고 있는데 그 글자에 대고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더블클릭하면 모든 병사를 징병할수 있습니다.
3번:산월 옆에 있는 섬을 마우스 오른쪽 버튼으로 더블클릭하면 병사를 백성으로 돌려 보낼수 있습니다.
4번:자신의 수도를 마우스 오른쪽 버튼으로 더블클릭하면 세력명을 변경할수 있습니다.
5번:신장수를 만들때 100명째되는 장수는 장수타입에서 국토무쌍이라고 있는데 그것을 선택하면 보너스치가 20뿐이지만 모든 능력치가 95이상입니다.



*How to 얼굴 편집*

RPG Viewer를 쓰시면 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 메뉴로 들어가신후 삼국지6 설치 경로를 지정하고 KAODATA.S6의 이미지 파일을 입출력 하시면 됩니다. 주의할 점은 팔레트가 256색이라는 것입니다.

RPGViewer28Build326.zip



*삼국지6 & 6PK 정보창 패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와 같이 삼국지 6에서 정보창이 서로 붙어 글자가 잘 보이지 않을때 사용하는 패치입니다.

s6upd.exe


s6pkupd.exe



*삼국지6PK 이벤트 모음*

아래 파일을 삼국지6PK가 설치된 폴더에 압축 해제해서 덮어 씌워 주시면 됩니다.

RECDATA.zip



*삼국지6PK 전술시뮬레이션 모드 엔딩 세이브*

아래 파일을 삼국지6PK가 설치된 폴더에 압축 해제해서 덮어 씌워 주시면 됩니다.

s6modesave.z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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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울리히 2012.03.09 04:4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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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번 받아갔었는데 처음 댓글 남깁니다.

삼6을 참 오래하고 있는데 유용한 정보로 많은 도움을 줘서 감사합니닷^^
From. Favicon of http://open2world.tistory.com 푸른빛 Open2World 2012.03.22 00:42 신고
PERMALINKDELETE/MODIFY
즐겜하세요. :)
From. 플뢰레 2013.03.20 22:24 신고
PERMALINKDELETE/MODIFYREPLY
정말 유용하네요 ^^
잘쓰겠습니다.
From. Favicon of http://open2world.tistory.com 푸른빛 Open2World 2013.12.29 08:46 신고
PERMALINKDELETE/MODIFY
즐삼하시길 :)
From. 풍금 2013.11.16 18:52 신고
PERMALINKDELETE/MODIFYREPLY
삼국지6을 가끔 하는데 이렇게 다 올려주셨네요 잘 받아갑니다~
From. Favicon of http://open2world.tistory.com 푸른빛 Open2World 2013.12.29 08:46 신고
PERMALINKDELETE/MODIFY
저도 간혹 추억 생각하며 돌려보긴 하네요. 즐삼하세요!
From. 라라 2013.11.17 11:01 신고
PERMALINKDELETE/MODIFYREPLY
제가 립버전을 설치했는데요 이 에디터 경로설정을 어떻게해야하나요ㅠ? 자꾸 오류가뜨네요 ㅠㅠ
From. Favicon of http://open2world.tistory.com 푸른빛 Open2World 2013.12.29 08:47 신고
PERMALINKDELETE/MODIFY
삼국지6가 설치된 / 압축 해제된 경로를 지정해주시면 됩니다.
From. 안녕하세요 2015.03.16 22:12 신고
PERMALINKDELETE/MODIFYREPLY
해킹된 실행 파일이 악성코드라고 다운이 안되네요... 백신하고 방화벽 꺼도 다음에서 자체 차단합니다.

그리고 중국산 에디터는 시나리오로 어떤 장수를 태수로 임명하고 소재를 바꾸면 도시가 세력권에 드는 대신 그 장수가 재야장수가 되어버리네요...; 공백도시를 상당히 싫어해서(유장이 형주 진출하고 그러니..) 메워버리려고 하는데 태수가 재야장수가 되어버리는 버그 때문에 고생중입니다. 해결방법이 없을까요?

다른 파일은 유용하게 잘 쓸게요. 삼6 정말 재미있어요.
[전투] 삼국지 - 장판파 전투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22:22

장비의 활약상이 돋보였던 장판파 전투입니다. 역시 연의를 바탕으로 한 설명입니다. 실제로 그랬을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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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판 파 전 투 >



[주야로 삼백리를 달려]


관도전투 이후로 8년이라는 세월동안 기주에 있는 원소의 잔당을 모두 싹쓸어 버리고 화북(華北) 8주를 소유한 조조는 건안 13년(208년) 7월 우금, 장료, 장합, 주령, 이전, 노초, 풍개 등 7군, 약 8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형주(荊州) 정벌에 나섰다.

마침 그때, 형주에서는 목(牧 : 지금의 장관)의 자리에 있던 유표가 죽고 차남인 유종이 막 뒤를 이은 상태였었다. 유종은 조조의 공격에 넋이 빠져 제대로 한번 싸우지도 않고 항복해 버렸다.

당시에 유비는 한수 북쪽 기슭에 있는 번성을 수비하고 있었는데 유종의 완전항복은 유비를 제쳐두고 이루어졌다. 유비가 조조와 유종의 일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조조군이 가까운 남양군의 완(宛)까지 쳐들어 온 후였다.

유비일행은 조조군의 발자욱소리를 등뒤로 하며 남쪽으로의 도피행을 시작했다. 한수를 건너 양양에 다다를 즈음, 유비를 존경하던 유종의 부하를 비롯하여 형주 백성들이 연이어 유비일행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당양에 도착했을 때에는 유비를 따르는 피난민이 10만여명, 가재도구를 실은 마차도 수천대에 이르렀다. 그 때문에 하루에 고작해야 10리정도씩 밖에 나아갈 수 없었다. 그러자 유비는 막신(幕臣) 관우에게 수백척의 배를 모으게 하여 난민을 태우고 먼저 강릉으로 향하게 하였다.

부하들은 "대장이 먼저 급히 가셔서 강릉을 지켜야함이 마땅합니다. 이 많은 난민들을 떠맡고 싸우기엔 전투인원이 너무 부족하므로 조조군이 쳐들어오게 되면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라고 말했으나 유비는 "모든 일의 근본은 백성이다. 나를 따르는 자들을 어찌 버린단 말인가! 라며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조는 요충인 강릉지역에 풍부한 군사용품이 비축되어 있어서 유비가 그 곳으로 도망치면 왠만한 방법을 써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뒤쫓아가기 위해 짐이 되는 병참대(뒤에서 인마나 군수품의 보충, 운반 따위를 맡아보는 부대)를 떼어놓고 전투요원만을 이끌어서 양양으로 가는 길을 서둘렀다.

양양에 도착한 조조는 유비가 이미 통과했다는 것을 알고는 서둘러 5천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추격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루에 300리 이상을 계속 달려가 결국 당양의 장판파에 이르러 유비일행을 따라잡게 되었다. 장판파의 싸움은 이렇게해서 시작되었다.



[조운(趙雲), 유비의 처자를 구하다]

조조는 많은 인명을 살륙하였고 유비군은 이 전투에서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이때 허겁지겁 도망치는 유비군의 후위부대의 역을 맡은 자가 바로 장비이다.

후위부대는 힘들고 많은 책임이 따르는 중대한 역할로서 특히 전투에 패했을 때에는 더욱더 그 임무가 막중하다. 따라서 이 역할은 원래 경험이 풍부한 명장이 아니면 해낼 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논어>에서는 공자(孔子)가 맹지반(孟之反)을 칭찬했던 구절이 나온다.

'맹지반은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지 않는 남자다. 패군의 후위부대를 맡았을 때 자기쪽 성문을 빠져나가면서도 말에 채찍질을 가하며 <이 녀석이 제대로 달려 보지 못했기 때문이지 내가 후위부대를 맡았기 때문이 아니다>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공자도 후위부대의 고충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장비가 이끌었던 후위부대는 고작해야 스무명 남짓했다. 이는 유비의 군대가 얼마나 빈약해는가를 가늠케 한다. 정기병대 오천명을 선발했던 조조는 유비군의 상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장비는 우선 장판교를 막고 서 있었다. 냇물을 방패삼아 이용한 것이다. 이윽고 조조군이 도착했다. 그러자 장비는 적을 노려보며 창을 쥐고선 "내가 바로 장익덕이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놈 있느냐?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상대 적은 모두 겁에 질려 멍하니 서 있을뿐이었다.

장비는 그렇게 해서 얼마간은 적을 막아냈으나 결국 다시 조조에게 추격당해 장비, 공명, 조운은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이 때 유비의 처자가 행방불명되자 조운은 수십명의 부하를 이끌고 전쟁터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우여곡절 끝에 조운은 유비의 아들 유선과 감부인을 무사히 구출해 냈다. 그 때 조운이 적군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본 사람이 '그가 적에게 항복했다'라고 급히 알리자, 유비는 그 자를 꾸짖으며 '조운은 나를 버리고 도주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한다.

조운이 유선일행을 호위하며 되돌아 온 것은 그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유비가 조운을 얼마만큼 신뢰했는지를 알 수 있는 이야기이다.


[겨뤄 보고 싶은 자 있거든 이름을 대고 나와 봐라!]

이것이 사서에도 나와있는 장판교(長坂橋) 싸움의 유명한 대사이다. 물론 연의에서도 가장 볼만한 장면 중 하나이다.

조조의 장수 문빙이 조운을 쫓아 장판교까지 따라오자 장비는 거친 수염을 곧세우고 왕방울만한 눈을 굴리며 창을 쥐고 다리 중간 지점쯤에 딱 버티고 서 있었다. 문빙은 얼떨결에 말을 세웠다.

연이어 위의 이름난 장수들이 한꺼번에 몰아 닥쳤으나, 다시 위에 서 있는 장비와 숲속에서 일어나는 모래먼지를 보고 공명의 계략인 줄로만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누구하나 나서는 자가 없었다. 그 모래먼지는 장비가 스무명의 부하들을 숲속에 매복시켜서 말의 꼬리르 나뭇가지에 묶게 하고는 말들을 달히게 한 것이었다. 그러면 숲에서 자욱한 모래먼지가 일어날테고 마치 많은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는것처럼 보이게 했던 것이다.

곧이어 급한 전갈을 듣고 조조가 친히 달려왔다. 죽 늘어선 깃발 중에 큰 도끼문양의 비단양산을 발견한 장비는 조조가 합세한 것을 알아차리고 '난 연나라 사람 장익덕이다. 나랑 겨뤄보고 싶은 자 있으면 이름을 대고 나와라!' 라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우뢰와 같은 우렁한 목소리에 조조군의 장수들은 오싹 온 몸이 저려 왔고 조조는 황급히 양산을 숨기게 되었다.

"전에 관우로부터 '동생인 장익덕은 백만명의 적에게 포위당해도 주머니 속의 물건을 꺼내듯이 대장의 목을 치는 장수'라는 얘기를 들었느데 역시 듣던대로군."

하고 조조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또 다시 장비의 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조는 엉겹결에 도망칠 자세를 취했다. 장비는 적들이 동요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덧붙이기를 '싸우겠다는 건가 안 싸우겠다는 건가? 어느 쪽이냐?' 라고 호통쳤다. 그러자 그 순간 조조의 바로 옆에 있던 하후걸이 너무 놀란 나머지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것을 본 순간 조조가 말머리를 휙 돌렸고 조조의 병사들도 앞을 다투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것이 연의에 씌여진 장판교 싸움인데 이 싸움에서 장비는 그의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관우도 장비 못지않게 용감하나, 침착하고 온후하며 사려깊은 면이 있다. 장비는 순진할 정도로 행동파인데다 4.3미터나 되는 긴 창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싸움이 격해지면 격해질수록 불처럼 타올라 적을 무찌르는 호걸타입이다.

장판교 싸움에서는 많은 숫자의 병력이 단 한 사람의 큰 고함소리에 도망쳐 버린 결과가 되었다. 만약 장비의 보고가 없었더라면 그 뒤에 벌어지는 <적벽대전>에서 유비군은 승리를 맛볼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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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삼국지 - 적벽 대전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22:18

삼국지에서 최대 전투로 알려진 '적벽 대전'에 대한 소개 입니다. 연의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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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 벽 대 전 >


동남풍을 이용한 화공계(火攻計)

건안 13년(208) 12월의 한밤중 장강 북쪽 강가에 있는 오림에서의 일이었다.

때마침 동남풍을 타고, 남쪽 강가에서 조조의 군대로 접근하는 한떼의 군선들이 있었다. 오군의 장수인 황개(黃蓋)가 인솔하는 열 척 남짓의 몽충함과 투함이었다.

배 위에는 장군 깃발과 용이 그려진 깃발이 휘날리고, 배 전체가 빨간 장막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야말로 조조도 속을 정도의 위장이었다. 장막 내부는 기름을 부은 마른 풀과 장작으로 가득차 있었다.

황개는 조조에게 이미 거짓으로 항복할 것을 알린 상태였기 때문에, 조조는 황개를 전적으로 믿고 있었다. 황개는 장강의 한 가운데를 건너자 마자 불을 붙인 횃불을 들고 부하들에게 큰소리로 항복을 외치게 했다. 조조군의 군사들은 안심하여 공격해 오지 않았다.

배가 조조군의 진영으로 2리(800미터 남짓)정도의 거리로 가까워지자, 황개는 일제히 배에 불을 붙였다. 불로 뒤덮인 배가 조조군의 진영으로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조조군의 배들은 운나쁘게도 모두 밧줄로 연결되어 있었다. 완벽하게 방어하기 위해 연결한 것이었지만, 완전히 예상을 뒤엎는 결과가 된 것이었다. 불붙은 황개의 배가 부딪쳐 조조군의 배에 불이 옮겨붙기 시작했다. 커지는 불꽃은 밤하늘을 밝히고, 대 가람(절의 큰 건물)의 불꽃놀이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일대 불바다를 이루었다.

그리고 물에 빠진 군사들과 말이 어찌할 바를 몰라 허우적거리고 말의 울음소리와 사람의 비명이 뒤섞여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불에 타 죽거나 불을 피하려다 끝내 물에 빠져 죽은 군사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불은 육지에 있는 병사에까지 옮겨붙게 되었다. 실로 지옥과 같은 장면이었다.

이런 상황을 반대편 강가에서 바라보고 있던 오군의 도독 주유는 전군에 총공격을 명했다. 북을 울리고 공격을 개시하는 정예 군사들.

극도로 혼란해진 조조의 군대는 대항하지도 못한채 흩어져 도망갔다.

조조 자신도 몇명 안되는 부하들에게 보호되어 간신히 사지를 벗어나, 후방 거점인 강릉으로 무사히 달아났다. 주유는 그런 조조를 계속하여 추격했다.

지치고 굶주린 조조군, 넋없이 화장되어...

이렇게 해서 조조는 쓰라린 일패를 맛보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왜 조조의 군대는 오림에서 20만의 대군을 거느리고도 단지 3만에 지나지 않는 오나라 군대의 공격에 수비 태세로 나가게 된 것일까?

실제로는 공격하려고 해도 공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조조군은 출정한 후로 이미 수개월이 지난 상태였다. 익숙하지 않은 기후와 뱃길을 통한 긴 여정때문에 완전히 지쳐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군사들 사이에 전염병이 많이 퍼져 있었고, 믿고 있었던 형주의 수군이 전의를 상실하여 믿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배의 앞과 끝을 서로 연결하여 장기전으로 전쟁에 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전법은 항상 공격에 대한 방어로는 훌륭하지만, 불을 이용한 공격에는 약하다. 이것은 조조도 물론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쨋든 계절이 겨울이었기 때문에 설마 동남풍(혹은 남풍)이 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것이다. 그러나 오나라 주유의 수군은 이 일대 지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불을 이용한 계략'의 가능성을 미리 점쳐보고, 흔치않은 기회를 성공시킨 것이다.

같은 해 7월, 한 왕시의 승상이 된 조조는 대군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유표가 망한 후의 형주를 순식간에 제압하여 유비를 무너뜨리는 등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어다. 그렇지만 이 쾌속 진격도 이미 한계를 맞아 공세도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조조는 그답지않게 이런것을 판별하지 못했고, 강가에서의 수상전에서와 같이 적의 함정에 빠진 것도 역시 경솔했다는 비난을 면할 수는 없었다.

조조에게 있어서 천하통일이라는 야망을 사실상 단념시키게한 실로 중요한 패전이 바로 이 적벽대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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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제갈공명도 두려워했던 명장 "장합"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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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영화 삼국지의 장합


실제로 장합은 제갈양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고 합니다. 장합은 삼국지에서 제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장수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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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합(長合)은 한말(漢末)의병모집에 응모하여 황건적 토벌에 참가하여 기주자사(冀州刺史) 한복(韓馥)의 휘하에 있었는데, 원소가 간계로 기주를 빼앗자 그대로 주저않아 그를 섬겨 공손찬(公孫瓚)을 궤멸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가 앉은 나무는 그를 용납할 재목이 못 되었다. 그에게는 필연적으로 주인을 바꿔야 할 숙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합이 조조를 만나기까지...]

조조와 원소의 운명을 갈라놓은 유명한 관도(官渡)싸움 때이다.

원소는 오소(烏巢)에 군량을 쌓아놓고 순우경으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했다. 순우경이란 난폭하기만 한 한낱 필부에 불과했다. 마음이 안 놓인 장합은 원소에게 이렇게 건의를 했다.

"조조의 군사는 날래고 정예부대입니다. 순우경은 사람이 용렬해서 감당해낼지 걱정입니다. 조조군이 급습하면 틀림없이 지탱하지 못하고 패할 것입니다. 만약 순우경이 패하여 병량기지 오소를 잃는다면 장군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기동부대를 오소 남쪽으로 급파해서 조조군의 기습에 대비해야 합니다."

장합의 건의가 참모 곽도(郭圖)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도리어 악진의 손에 순우경의 목이 날아가고 오소를 빼앗겨 원소군은 궤멸적 타격을 입고 만 것이다.

책임을 뒤집어 쓸까 겁이난 곽도의 중상모략으로 장합은 주저없이 조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장합은 비로소 자기를 알아주는 주인을 만난 것이다.


[공명도 두려워 했다는 장합]

서기 215년 조조가 한중(漢中)의 장로(張魯)를 토벌해서 하후연(夏侯淵)과 더불어 그곳을 수비하게 되었다. 그러나 법정(法正)의 계책에 의하여 사령관이 하후연이 노장 황충의 손에 죽고 진중이 모두 아연실색하여 뒤숭숭해졌다. 이때 하후연의 사마(司馬)로 있던 곽회(郭淮)가 기지를 발휘했다.

"제장들은 조금도 걱정할 게 없다. 장 장군으로 말하면 국가의 명장으로 유비조차 두려워 하는 분이다. 지금 비록 위급하다 해도 장 장군이 계시니 동요하지 말고 본분을 다하라."

그리하여 죽은 하후연 대신 장합을 군주(軍主)로 추대했다. 동요하던 군심도 이로써 가라앉고 장합은 패군을 수습하여 무사히 한중에서 후퇴했다.

<위략(魏略)>에 이런 대목이 있다.

하후연이 비록 도독(都督: 총사령관)이었다고는 하지만 유비는 하후연을 가벼이 보고 장합을 두려워했다. 하후연을 죽였다는 보고를 받고 유비가 말했다.

"진짜(장합)를 잡아야지 하후연 정도를 뭣에 쓰겠단 말인가."

진수의 <장합전>에도 제갈량이 그를 어려워했다는 언급이 있는 것을 보면 지략이나 용맹 어느 면에서나 나무랄 데 없는 명장이었던 것 같다.


[장합의 최후]

서기 231년 사마의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고 나서부터는 촉군에 대한 공격책을 진언하는 장합을 번번이 물리쳐 그는 앙앙불락한 말년을 보냈다. 이 해 기산(祁山)에서 진격한 촉군을 견제하기 위해 사마의의 명으로 약양(略陽)까지 진출, 후퇴하는 촉군을 쫓다가 목문(木門)에 이르러 격전을 벌이던 중 촉군의 화살을 오른쪽 무릎에 맞아 진중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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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삼국지 - 정사 "공손찬전"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22:10

중국영화 삼국지의 공손찬

중국영화 삼국지의 공손찬


연의에서는 어느정도 양호하게 묘사되는 인물이나 정사에서는 평할 가치도 없는 인물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그래도 나름대로 매력있는 인물.. 백마장사라고도 불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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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찬전(公孫瓚傳)

공손찬은 자가 백규(伯珪)이다. 요서군(遼西郡) 영지현(令支縣) 사람으로, 요서 군현 문하의 서좌(書佐)에 임명되었다. 그는 용모가 당당하고 큰 목소리를 가졌으므로, 유태수는 그가 빼어난 인재임을 알아보고 자기 딸을 그의 아내로 삼도록 하고, 탁군 사람 노식(盧植)에게 보내어 경전을 배우도록 했다. 나중에 공손찬은 또 군의 낮은 벼슬아치가 되었다. 유태수(유기)가 법령을 어겨 정위로 불려갈 때, 법률에는 아랫사람이 가까이 가는 것을 금했지만, 공손찬은 수레몰이가 되어 스스로 고된 일을 맡았다. 유태수가 일남군(日南郡)으로 귀향갔을 때, 공손찬은 쌀과 고기를 준비해서 북망산(北芒山)에 올라가 선조들에게 제사지냈는데, 그는 술잔을 들어 축원하며 말했다.

"옛날에 저는 다른 사람의 아들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었으니 마땅히 일남군으로 가야 합니다. 일남군에는 독기가 가득하여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기에, 이곳에서 선조들에게 이별의 말씀을 올립니다."

그는 두 번 절하고 감정이 격앙되어 일어나니, 이 때 그의 행동을 본 사람들은 모두 찬탄하였다. 유태수는 가는 도중에 사면되어 돌아왔다. 공손찬은 효렴으로 추천되고 랑이 되었으며, 요동속국(遼東屬國:유주에 속하며 여섯 개의 성을 관한함)의 장사(長史:부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일찍이 수십 명의 기병을 이끌고 요새를 순시하러 갔다가 수백 명의 선비족 기병을 발견하였는데, 사람들이 없는 마을로 물러나 부하 기병에게 말했다.

"지금 우리들이 이들을 뚫고 나가지 못한다면 모두 죽을 것이다."

공손찬은 직접 창을 잡고, 그 양쪽의 칼날을 날카롭게 하여 말을 달려, 선비족 기병들을 찔러 몇 십 명을 죽이거나 부상입혔다. 그의 부하 기병 또한 절반이 목숨을 잃었지만, 결국 몸은 빠져나올 수 있었다. 선비족은 타격을 입은 이후로 두 번 다시 국경을 넘어 침입하지 못했다. 공손찬은 탁현의 현령으로 영전되었다.

한나라 광화 연간에 양주의 도적이 봉기했을 때, 조정에서는 유주의 돌격 기병대 3천 명을 징발하였으며, 공손찬에게 도독의 권한을 주어 그들을 지휘하도록 했다. 군대가 계중까지 갔을 때, 어양 사람 장순(張純)이 요서군 오환족의 구력거(丘力居) 등을 꼬여 반란을 일으켜 귀중에서 약탈을 하고, 자칭 장군이라 하면서 관리와 백성들을 협박하고 우북평군과 요서군 속국의 여러 성을 공격하였는데, 모두 그들에게 잔혹하게 무너졌다. 공손찬은 수라의 부대를 인솔하여 장순 등을 추격해서 공을 세우고 기도위로 승진되었다. 속국 오환족의 탐지왕(貪至王)이 부족 사람들을 이끌고 공손찬에게 투항했다. 공손찬은 또 중랑장으로 승진하고 도정후에 봉해졌고, 진군하여 요동속국에 주둔하며 선비족과 5~6년 동안 서로 공방전을 벌였다. 구력거 등이 청주, 서주, 유주, 기주를 약탈하여 이 네 주는 피해를 입었지만, 공손찬은 막아낼 수 없었다.

종정관(宗正官)은 도덕과 인의를 갖춘 사람으로서 옛날 유주자사로 있으면서 그의 은혜와 신의를 널리 전하였으므로 오랑캐들조차도 그에게 복종하였으니, 만일 그에게 진압하고 달래도록 한다면 병사들을 수고롭게 하지 않으면서 그 지역을 안정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정에서는 판단했다. 그래서 유우를 유주목으로 임명했다. 유우는 임용된 후 선비족에게 사람을 보내어 반역을 했을 경우의 이해관계를 설명하고, 장군의 머리를 보내도록 요구해했다. 구력거 등은 유우가 왔다는 말을 듣고 매우 즐거워했으며, 각각 통역을 하여 자발적으로 귀순을 요청했다. 공손찬은 유우의 공로를 질시하였으므로, 몰래 사람을 보내어 오랑캐의 사자를 죽이도록 했다. 선비족은 이 일을 알고 샛길로 달려와서 유우를 만났다. 유우는 상주하여 여러 곳의 주둔병을 철수시키고, 단지 공손찬이 이끄는 보병과 기병 1만 명만 남겨 우북평을 지키도록 했다. 장순은 처자식을 버리고 선비족 속으로 달려왔지만, 식객 왕정(王政)에게 살해되어 그의 머리가 유우에게 보내졌으며, 왕정은 열후에 봉해졌다. 유우는 공을 세웠으므로 태위에 임명되었고, 양분후(襄奮侯)에 봉해졌다. 이 때 마침, 동탁이 낙양으로 와서 유우를 대사마로 승진시키고, 공손찬을 분무장군으로 임명하고 계후로 봉했다.

관동지역에서 의군이 일어나자, 동탁은 황제를 협박하여 서쪽(장안)으로 수도를 옮기고, 유우를 불러 태부로 임명했지만, 길이 막혀서 이 명령이 전달될 수 없었다. 원소와 한복은 상의하여 황제가 간신들에게 제어당하고 있어 천하의 사람들은 마음을 귀의할 곳이 없는데, 유우는 황족으로 평판이 높고 인망이 있으니, 유우를 황제로 추대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사자를 보내 유우를 만났지만, 유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소 등은 유우에게 상서 일을 맡아(정치적 책임자가 된 것), 단독으로 일을 처리하는 권한을 얻어 관직에 임명하도록 권유했지만, 유우는 승낙하지 않았으며, 원소 등과 우호관계만 유지했다.

유우의 아들 유화(劉和)는 시중이 되어 장안에 머물고 있었다. 천자는 동도(東都:낙양)으로 돌아오려는 생각으로 유화에게, 동탁에게서 거짓으로 도망쳐 몰래 무관(武關)에서 나와 유우를 찾아 군대를 이끌고 맞이하러 나오도록 명령했다. 유화는 원술의 영지를 지나게 되었으며, 원술에게 천자의 생각을 설명했다. 원술은 유우를 이용하여 견제하고 있었으므로 유화를 붙잡아 두고 출발시키지 않았으며, 유우의 군대가 도착한 후에 그와 함께 서쪽으로 갈 것을 승낙하고 유화로 하여금 유우에게 편지를 쓰도록 했다. 유우는 유화의 편지를 받고 수천 명의 기병을 그에게 보내 주었다. 공손찬은 원술이 두 마음을 갖고 있음을 알고 군대를 파견하지 않으려고 했으며, 유우가 군대를 일으키는 것을 제지하려 했으나 유우는 듣지 않았다. 공손찬은 이 점을 원술이 듣고서 원망할까 두려워하여 그의 사촌동생 공손월(公孫越)에게 기병 수천 명을 인솔하여 원술에게 가서 손을 잡게 하고, 비밀리에 원술을 시켜 유화를 잡아 그가 갖고 있던 군사 지휘권을 빼앗도록 했다. 이로부터 유우와 공손찬은 더욱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유화는 원술에게서 도망나와 북쪽을 향해 달렸으나, 또 다시 원소에게 잡혀 머물게 되었다.

이 때, 원술은 손견을 보내 양성에 주둔시켜 동탁에 대항하도록 하였고, 원소는 주앙(周昻)을 보내 그곳을 탈취하도록 하였다. 원술은 공손월과 손견을 보내 주앙을 공격하도록 했으나 승리하지 못했고, 공손월은 날아오는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으니, 공손찬은 격노하여 말했다.

"내 동생이 죽었으니, 이 재난은 원소로부터 시작되었다."

군대를 내보내 반하(磐河)에 주둔시키고 원소에게 복수할 준비를 했다. 원소는 두려웠으므로, 자기가 차고 있던 발해태수의 인수를 공손찬의 사촌 공손범(公孫范)에게 주고, 그를 발해군으로 보내어 공손찬과 우호관계를 맺으려 했다. 공손범은 발해 군대를 이끌고 공손찬을 도와 청주와 서주의 황건을 격파시키니, 군대는 더욱 강성해졌고 계교(界橋)까지 진군하였다. 그는 엄강(嚴綱)에게 기주를 다스리게 하고, 전해(田楷)에게 청주를 다스리게 했으며, 단경(單經)에게 연주를 다스리도록 하여 군이나 현의 장관을 임명했다. 원소는 광천(廣川)에 진을 치고, 대장 국의(麴義)를 앞쪽에 배치하여 공손찬과 싸우게 하였고 엄강을 사로잡았다. 공손찬은 발해에게 달아나 공손범(公孫範)과 함께 괵주로 돌아와 큰 성 동남쪽에 작은 성을 만들었는데, 유우가 있는 곳과 접근해 있었으므로 점차 서로 원한을 품고 바라보게 되었다.

유우는 공손찬이 난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군대를 움직여 공손찬을 공격했다. 그러나 유우는 공손찬에게 패하여 거용(居庸)으로 도주하였다. 공손찬은 거용을 공격하여 유우를 사로잡았으며, 그를 포로로 하여 괵주로 돌아왔다. 이 때 동탁이 죽었으며, 천자는 사자 단훈(段訓)을 보내어 유우의 식읍을 증가시키고 육주(六州)를 감독하도록 했고, 공손찬은 전장군으로 승진하고 역후(易侯)로 봉해졌다. 공손찬은 유우가 황제를 칭하려 했다고 무고하고, 단훈을 협박하여 유우를 참형에 처했다. 공손찬은 단훈을 추천하여 유주사자로 임명시켰다. 공손찬은 교만하고 방자하여 다른 사람의 잘못은 기억하지만, 장점은 잊어버려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살해되었다. 유우의 종사 어양(漁陽) 사람 선우보(鮮于輔)와 제주(齊周) 기도위 선우은(鮮于銀) 등은 유주의 병사들을 이끌고 공손찬에게 복수하려고 하였는데, 연(燕)나라 사람 염유(閻柔)는 줄곧 은혜를 베풀고 신뢰를 쌓았으므로 모두들 염유를 오환족의 사마로 추대하였다. 염유는 오환족과 선비족을 끌어들이고, 이민족과 한나라 사람 총 수만 명의 군사를 얻어 공손찬이 배치시킨 어양태수 추단(鄒丹)과 노북(潞北)에서 접전을 벌여 그를 무찌르고 아울러 죽였다. 원소는 또 국의와 유우의 아들 유화에게 군사들을 지휘하게 하여 선우보와 합류시켜 공손찬을 공격하도록 했다. 공손찬은 몇 차례 싸움에서 지더니 역경(易經)으로 도망가 수비만 공고히 했다. 그는 열 겹의 참호를 파고, 참호 뒤로는 아주 높은 흙산을 쌓았는데, 높이는 대여섯 장이나 되며, 그 위에 누각을 만들었다. 참호 안 중심에 쌓은 흙산은 그 높이가 십 장(丈)에 이르며, 그 자신은 그 위에 머물렀고 그곳에 3백만 석의 곡물을 쌓아 놓고 있었다. 공손찬이 말했다.

"과거에 나는 천하의 일은 손가락으로 휘둘러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보니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없소. 병사들을 쉬게 하고 농사에 온 힘을 기울여 양식을 축적하는 것이 더 낫소. 병법에 백 겹의 누대는 공격할 수 없다고 하였소. 지금 나의 누대는 천 겹이고, 이곳 양식을 다먹으면 천하의 정세는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오."

그는 이런 방법에 의지하여 원소가 지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생각을 했다. 원소는 대장을 보내 공격했지만 , 몇 년이 되도록 함락시킬 수 없었다.

건안 4년(199)에 원소는 전군을 출동시켜 공손찬을 포위했다. 공손찬은 아들을 흑산적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하도록 하고, 자기는 집적 돌격 기병대를 이끌고 단숨에 포위망을 뚫고 나와 서남쪽의 산악지대를 따라 흑산의 병력을 거두어 기주를 공격하여 원소의 후원을 단절시키려고 생각했다. 장사 관정(關靖)이 공손찬을 설득하여 말했다.

"지금 장군의 장수와 병사들은 땅이 꺼지듯 완전히 와해되었습니다. 그들이 서로 유지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은 집에 있는 부모와 자식을 걱정하고 장군을 주인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장군이 장기간 지키고 있는다면, 원소는 장차 자발적으로 군대를 물릴 것입니다. 워소가 자진하여 군대를 물리고 나면, 사방의 무리들은 또 모일 것입니다. 만일 장군이 지금 이곳을 버리고 떠난다면, 군대는 지켜야만 되는 중요한 곳이 없어지게 될 것이고, 역경은 순간적으로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장군이 본거지를 잃고 황야로 고독하게 떠돌면 또 무슨 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공손찬은 출동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구원병이 도착한 후, 공손찬은 안팎에서 원소를 공격하려고 사람을 시켜 아들에게 펴니를 보내 날을 정하고, 군대가 도착하면 횃불을 들어 알리도록 했다. 원소의 염탐꾼이 그 편지를 손에 넣어 약속한 날에 횃불을 들었다. 공손찬은 구원병이 도착하였다고 생각하고 병사를 내보내어 싸움을 시작했다. 원소는 복병을 숨겨 놓고 공격을 하였으므로, 공손찬은 크게 패배하고 돌아와 수비를 굳게 했다. 원소는 땅 밑으로 길을 파서 돌격하여 누각을 무너뜨리고, 공손찬이 살고 있는 중앙의 흙산 가까이까지 갔다. 공손찬은 자신이 졌음을 알고, 처자식을 전부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선우보가 그의 부하들을 데리고 천자의 명을 받들었으므로 천자는 그를 건충장군(建忠將軍)에 임명하고, 유주의 육군을 감독하도록 했다. 조조와 원소 등이 관도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염유가 사자를 조조에게 보내 투항을 신청했으므로, 그를 호오환교위(護烏丸校慰)로 승진시켰다. 또 선우보가 직접 조조를 만나러 왔으므로 좌도요장군(左度遼將軍)으로 임명하고 정후로 봉하여 원래의 주(유주)로 돌아가 진무하도록 했다. 조조가 원담이 있는 남피를 격파하자, 염유는 부하와 선비족을 이끌고 와서 명마를 바치고 대군을 영접하였으며, 삼군의 오환족 요서군의 답돈(踏頓), 요동군의 소복연(蘇僕延), 우북평군(右北平郡)의 오연(吳延) 을 정벌하는데 참가하였으므로 그를 관내후에 봉했다. 선우보는 또 그의 부하들을 인솔하여 조조를 따라가 싸웠다. 위문제는 황제 자리에 있을 때, 선우보를 호아장군(虎牙將軍)에 임명하고, 염유를 도요장군(度遼將軍)에 임명하였으며, 모두 현후(縣侯)로 승진시켜 봉하고 특진의 자리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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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삼국지 - 정사 "곽가전"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22:05

삼국지 Ⅸ의 곽가

삼국지 Ⅸ의 곽가



지략으로 보면 삼국지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곽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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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가전(郭嘉傳)

곽가는 자가 봉효이고, 영천군 양적현 사람이다.

처음에는 북방을 지나다가 원소를 만났는데, 원소의 모신으로 있었던 신평과 곽도에게 말했다.

"무릇 지혜가 있는 사람은 주군이 될 사람을 헤아려야만 백 번 군대를 일으켜 백 번 완벽하게 공명이 세워질 수 있는 것이오. 원공은 한갓 주공의 낮은 선비를 모방하려 하고, 인재를 등용하는 기틀을 알지 못하고 있소.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서단은 많으나 요령이 적고, 모략을 좋아하지만 결단력이 없어 그와 더불어 천하의 큰 난국을 구제하고 패도로서 왕업을 정하기는 어려울 것이오."

그리고는 마침내 원소를 떠났다. 이보다 앞선 시기에 영천의 희지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책략에 뛰어난 인물이므로 조조는 그를 매우 중용했지만, 일찍 죽었다.

조조는 순욱에게 글을 써서 말했다.

- 희지재가 죽은 이후로는 나와 더불어 일을 계획할 수 있는 사람이 없소. 여남과 영천에는 본래 뛰어난 인물이 많거늘, 누가 희지재를 계승할 수 있겠소?

순욱은 곽가를 추천하였다. 조조는 그를 불러 천하의 일을 논의하고, 곽가에게 말했다.

"나로 하여금 큰 일을 이룰 수 있게 할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이구나."

곽가는 밖으로 나가서 역시 기뻐하며 말했다.

"조공은 진정 나의 주공이구나!"

조조는 표를 올려 곽가를 사공군좨주로 삼았다.

조조가 여포를 정벌할 때 세 번 싸워 그를 격파하자, 여포는 퇴각하여 성을 굳게 지켰다. 그 당시 조조 군대의 사졸들은 지쳐있었으므로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잡아오려고 생각했는데, 곽가가 조조에게 급히 공격하라고 설득하여 마침내 여포를 사로잡을 수 있었다. 이 일은 <순유전>에 있다.

손책(손책)은 1천 리에 걸쳐 전선을 구축하고 강동의 주군을 거의 소유하였다.

그는 조조가 원소와 관도에서 대치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강을 건너 북방의 허도(허도)를 습격하고자 했다. 조조 진영의 모든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였는데, 곽가는 이 일을 헤아려 말했다.

"손책은 이제 막 강동을 병탄한 것이며, 그에 의해서 주살된 자들은 모두 영웅 호걸이며 주군을 위해 죽을 힘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손책은 경솔하고 대비도 없으니, 비록 백만의 군대가 있다고 해도 혼자 중원(중원)에 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만일 자객이 숨어 있다가 일어나면 단지 한 사람의 적일 뿐입니다. 제가 그를 보건대 반드시 필부의 손에 의해서 죽을 것입니다."

손책은 장강에 임하여 건너기도 전에 과연 허공(허공)이라는 자객에 의하여 죽음을 당했다.

후에 곽가는 조조를 따라 원소를 격파했다. 원소가 죽은 후에 또다시 대군을 따라 원담과 원상을 여양에서 크게 물리쳐 모두 승리했다. 여러 장수들은 승리한 여세를 몰아 그들을 크게 공격하려고 했으나, 곽가가 말했다.

"원소는 이 두 아들을 사랑했으나, 생전에 누구를 세워야 할 지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곽도와 봉기가 그의 모신이 되었지만, 반드시 원씨 형제들 사이에서 서로 다투다가 역시 서로 어그러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군대가 그들을 핍박하면, 그들 형제는 군대를 합쳐 우리와 서로 대치하게 될 것이고, 그들을 느슨하게 풀어주면 그들 형제는 다투려는 마음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남쪽으로 가서 유표를 정벌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그리고서 형세의 변화를 기다렸다가 변화가 생긴 후에 공격하면 한 번 출동으로 평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조조는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좋소"

그리고는 남쪽으로 정벌을 떠났다. 군대가 서평(서평)에 이르렀는데, 원담과 원상은 과연 기주를 차지하려고 다투고 있었다. 원담은 원상에게 패배하게 되자 달아나 평원(평원)을 지켰으며, 아울러 신비를 보내 조조에게 항복을 구했다.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 그를 구해주었으며, 마침내 업성을 공략하였고, 또 다시 남피에서 원담을 공격하자 기주는 평정되었다.㈜ 조조는 표를 올려 곽가를 유양정후(유양정후)로 봉하게 했다. 조조가 원상 및 삼군의 오환족을 정벌하려고 할 때, 부하들은 대부분 유표가 유비를 파견하여 허도를 습격함으로서 조조를 칠 것이라고 두려워하였는데, 곽가가 말했다.

"명공은 비록 천하에 위세가 진동하지만, 오랑캐들은 그가 먼 곳에 있는 것만 믿고 반드시 방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방비하지 않은 것을 틈타 갑자기 그들을 공격하면 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원소는 항상 북방 오랑캐의 민중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며, 원상 형제도 아직 생존해 있습니다.

지금 원씨가 다스리는 네 주의 백성들은 공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잠시 귀순하게 되며, 명공께서는 은덕을 더 이상 베푸시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 만일 원상을 남겨 놓고 남쪽으로 정벌하러 가시면 원상은 한족의 도움에 의지하여 다시 주인을 위해 죽음을 본받았던 신하들을 불러들이게 될 것이고, 오랑캐들이 다시 한 차례 충돌하면 한족들이 모두 호응하게 될 것이며, 이렇게 되면 오환의 선우 답돈은 또 다시 남쪽으로 중원을 넘보려는 야심을 품게 될 것이며, 제업(제업)의 야심을 이루게 되면, 아마도 청주와 기주도 우리의 소유가 아닐 것입니다. 유표는 단지 앉아서 이야기하는 세객(세객)일 뿐입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재략이 유비를 제어하는 데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유비에게 중임을 맡기면 제지할 수 없을 것이고, 유비를 하찮은 직책에 임용하면 유비는 쓸모가 없으니, 공께서 비록 나라를 비워두고 멀리 정벌하러 가더라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조조는 이 말을 듣고 드디어 떠났다. 대군이 역현(역현)에 이르자 곽가가 말했다.

"군대는 신속함을 귀하게 여깁니다. 지금 천 리나 행군하여 다른 사람을 습격하는데, 치중이 너무 많아 이로움을 얻기가 힘들며, 또한 적들이 공격소식을 듣고서 반드시 방비하게 될 것이니, 치중을 남겨두고 가볍게 무장한 병사들을 낮과 밤을 달려 충돌하게 되면 그들은 생각지도 못한 시기에 습격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조조는 곧 비밀리에 노용새(노용새)에까지 보내어 직접 선우 답돈의 용정(용정)에까지 이르게 했다. 파로(파로)의 병졸들은 조조의 대군이 갑자기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면서 맞붙어 싸웠다. 조조는 오환군(오환군)을 크게 이기고, 답돈의 머리를 베었으며, 각왕(각왕;큰 부족의 왕) 이하의 지도자를 모두 참수했다.

원상과 그의 형 원희는 요동으로 달아났다.

곽가는 깊은 통찰력이 있었고 모략(모략)을 세우는 데 뛰어났으며, 사리와 인정(人情)에 대해서는 통달했다. 조조가 말했다.

"오직 봉효(봉효;곽가의 자)만이 나의 뜻을 확실히 알 수 있소."

나이 서른여덟에 유성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질병이 심했다. 조조는 그의 질병에 관해 물어보고 여러 차례 문병을 갔다. 곽가가 죽었을 때, 조조는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매우 슬퍼하면서 순유 등에게 말했다.

"여러분들의 나이는 모두 나와 동년배지만, 오직 봉효만이 가장 젊소. 천하를 평정하는 일이 끝나, 그에게 뒷일을 부탁하려고 했는데, 중년의 나이에 요절하였으니, 이는 운명이요!"

곧 이어 천자에게 표를 올려 말했다.

- 군좨주(군좨주) 곽가는 정벌에 따라 나선지 11년이 되었습니다. 매번 중대한 논의가 있었으며 적을 만나면 변화에 대처하였습니다. 신의 책략이 결정되지도 않았을 때, 곽가는 문득 그것을 처리하였습니다. 천하를 평정하는데, 그의 모략과 공적은 높습니다.

불행하게도 명이 짧아 대업을 끝마치지 못했습니다. 곽가의 공을 거슬러 생각해 보면, 진실로 잊을 수 없습니다. 그에게 식읍을 8백호 증가시켜 주시어 이전의 것과 합쳐 1천 호가 되도록 해 주십시오."

시호를 정후(정후)라 하고, 아들 곽혁(곽혁)으로 하여금 뒤를 잇게 했다.

나중에 조조가 형주를 정벌하고 돌아올 때, 파구(파구)에서 역질을 만나 군함을 모두 태워 버리고 탄식하며 말했다.

"곽봉효가 살아 있었더라면, 나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전에 진군(진군)은 곽가의 품행이 수양되어 있지도 않고 검소하지도 않다고 하면서 비난하였고, 몇 차례에 걸쳐 조정에 곽가를 기소했지만, 곽가의 의지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으므로 조조는 곽가를 더욱더 중시했다. 그러나 조조는 진군이 정도(정도)를 견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역시 그에게도 호감을 갖고 있었다.

곽혁이 태자의 문학(문학)이 되었지만,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아들 곽심(곽심)이 뒤를 이었다. 곽심이 죽자, 아들 곽창(곽창)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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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삼국지 - 정사 "이엄전"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21:57

삼국지 Ⅸ의 이엄(이평)

삼국지 Ⅸ의 이엄(이평)



촉의 이엄(이평)에 대한 글입니다. 상당히 좋은 평을 받은 인물이었으나 한번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거짓 보고)로 쓸쓸히 초야에서 생을 마감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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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엄은 자가 정방이고, 남양군 사람이다. 젊었을 때 군의 관리가 되었고, 잭산으로 인하여 칭찬받았다. 형주목 유표는 그를 차견하여 여러 군현의 장을 역임하도록 했다. 조조가 형주로 진입했을 때, 이엄은 자귀현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서쪽의 촉나라로 달아났다. 유장은 그를 성도의 현령으로 임명했고, 그는 또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건안 18년(213)에 이엄을 호군으로 임명하여 면죽에서 유비를 막아내도록 했다. 그런 이엄은 병사들을 이끌고 유비에게 투항했다. 유비는 이엄을 비장군으로 임명했다. 성도가 평정된 후, 건위태수, 흥업장군으로 임명 되었다.

23년(218)에 도적 마진, 고승등이 처에서 모반하여 수만 명을 모아 자중현으로 진격했다. 그 당시 유비는 한중에 있었고, 이엄은 다시 병사를 징발할 수 없었다. 단지 그 군의 병사 5천 명을 이끌고 토벌하러 가서 마진과 고승등의 머리를 베었을 뿐이다.

잔여세력들은 뿔뿔이 흩어져 전부 민적으로 회복되었다. 또 월수 만족의 우두머리 고정이 군대를 파견하여 신도현을 포위하자, 이엄은 기병을 이끌고 달려가 구원하여 적은 모두 달아났다. 보한장군의 관직을 더했으며, 건중군을 관리하는 것은 이전과 같았다.

장무 2년(222)에 유비는 이엄을 불러 영안궁까지 오도록 하여 상서령으로 임명했다. 3년(223)에 유비의 질병이 악화되자, 이엄은 제갈양과 함께 어린 유선을 보좌하라는 유조를 받았다. 이엄을 중도호로 임명하고 안팎의 군사를 통솔하며 영안에 주둔하도록 했다.

건흥 원년(223)에 도향후로 봉하고 가절로 삼고 광록훈을 더했다. 4년(226)에 전장군으로 전임됐다. 제갈양은 한중으로 출병하려고 하면서 이엄이 반드쉬 뒷일을 맡아 줄것으로 생각하고 강주로 옮겨 주둔시키고, 호군 진도를 남겨 영안에 주둔시켜 모두 이엄의 통솔하에 두었다. 이엄은 맹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말했다.

저는 제갈공명과 함께 유비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책임이 막중한 것이 걱정입니다. 좋은 동반자를 얻고 싶습니다.

제갈양 역시 맹달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일을 처리하는 것이 마치 물흐르듯하여, 해야할 일과 버려야 할일을 결정할때 주저함이 없는 것이 정방의 성격입니다.

이엄이 귀하게 존중받는 것은 이와 같았다.

8년(230)에 표기장군으로 승진했다. 조진이 세 갈래 길로 나누어 한천으로 진격해 왔으므로, 제갈양은 이엄에게 2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한중에 가도록 명령했다.

제갈양은 표를 올려 이엄의 아들 이풍을 강주도독독군으로 임명하고, 이엄의 후방 일을 담당하도록 했다. 제갈양은 다음해 출병을 확정짓고 이엄에게 중도호의 신분으로 승상부의 일을 맡도록 명령했다. 이엄은 이평으로 개명했다.(이엄=이평)

9년(231) 봄에 제갈양의 군대는 기산에 주둔하였고, 이평이 수송 업무를 재촉하며 감독했다.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계속 장마비가 쏟아져 식량 운반이 지속되지 못했으므로, 이평은 참군 호충과 독군 성번을 파견하여 그의 뜻을 설명하고 제갈양에게 후퇴하여 돌아오도록 하라고 했다. 이평은 군대가 후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거짓으로 날란체 하며 말했다.

"군량미는 아직 충분하거늘, 어찌하여 돌아옵니까?"

이평은 이렇게 하여 자기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책임을 벗어나고 제갈양이 진군하지 않은 잘못을 분명하게 나타내려고 했다. 또 유선에게 표를 올려 말했다.

우리 군대가 거짓으로 퇴각한 것은 적을 유인하여 함께 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갈양이 이평이 앞뒤로 쓴 편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공개했으므로, 이평의 잘못은 분명해지게 되었다. 이평은 힘껏 변명하고 죄를 자백하고 사죄했다. 그래서 제갈양은 이평의 일을 상주하여 말했다.

선제께서 붕어하신 이후부터 이평은 임지에서 기산을 다스리며 작은 은혜를 베푸는 일을 하기를 원했고, 자신을 지키고 명예를 추구하며 나라의 일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북방으로 출병을 하면서 이평의 병사들에게 한중을 지키도록 하려고 했습니다. 이평은 이일을 직접 하기에는 어려우며, 올 의사가 없었으므로 다섯 개 군을 주어 파주자사로 임명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작년에 신이 서쪽으로 정발나가려고 하면서 이평으로 하여금 한중을 관리하도록 했는데, 이평은 사마의 등이 관서를 설치하여 자신을 초청했다고 말했습니다. 신은 이평의 계산으로 출병한 기회를 틈타 신을 핍박하여 자신에게 이익을 얻도록 하려고 했음을 알았습니다. 이 때문에 표를 올려 이평의 아들 이풍에게 강주를 관리하도록 하고 융성한 대우를 해줌으로써 한 시기의 정무를 처리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평이 한중에 있을 대, 모든일을 그가 책임지도록 했으므로 신하들은 지위의 높고 낮음을 불문하고 모두들 신이 이평을 너무 후하게 대우한다며 질책했습니다. 그대는 국가의 대사가 아직 확정되자 못했으며 한나라 왕실이 기울어 위험하였으므로, 이평의 잘못을 문책하는 것은 그를 칭찬하는 것만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평의 마음은 영예와 이익에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지, 이평의 마음이 시비를 전도시키는 데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만일 일의 처리를 늦추게 된다면 재화와 실채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신이 민첩하지 못한 결과이며, 설며을 많이 할수록 허물은 늘어 날 것입니다.

곧바로 이평의 관직을 폐하여 서민이 되게 했으며, 재동군으로 방축시켰다.

건흥 12년(234)에 이평은 제갈양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질병이 들어 죽었다. 이평은 항상 제갈양이 자신을 다시 살려줄 것으로 기대했으며, 제갈양의 후계자는 이런 기회를 주지 않을 것임을 헤아렸기 때문에 격분하여 결국 병들어 죽은 것이다. 이풍의 관직은 주제태수에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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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삼국지 - 정사 "위연전"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21:53

삼국지 Ⅸ의 위연

삼국지 Ⅸ의 위연



삼국지 연의에서는 위연을 끝에 촉을 배반한 惡人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정사의 위연전은 이와 다르게 위연을 다른 시각에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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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연전(魏延傳)

위연은 자가 문장(文長)이고, 의양군(義陽郡) 사람이다. 그는 부속(部屬)의 신분으로 유비를 수행하고 촉으로 들어가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으므로 아문장군으로 승진했다.

유비는 한중왕이 되었을 때, 성도로 옮겼으므로 한천(漢川)을 지킬 중요한 장수를 얻어야 했다. 사람들의 의론은 틀림없이 장비가 임용될 것이라는 데 있었고, 장비 또한 마음속으로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유비가 뜻밖에 위연을 발탁하여 한중왕 진원장군(鎭遠將軍)으로 임명하고 한중태수를 겸임하도록 하자 군사들은 전부 놀랐다.

유비는 신하들을 모아 놓고 위연에게 질문했다.

"지금 그대에게 중임을 맡겼는데, 그대는 직무를 어떻게 담당할 것인지 말해 보시오."

위연이 대답했다.

"만일 조조가 천하를 들어온다면, 대왕을 위해 그를 막기를 원합니다. 부장이 인솔하는 10만 병사를 이르게 한다면 대왕을 위해 그들을 소멸시키기를 원합니다."

유비는 그를 매우 칭찬하고, 사람들은 모두 그의 장엄한 말에 감복했다. 유비가 제호를 칭한 후, 위연을 진북장군으로 승진했다.

건흥 원년(223)에는 위연을 서쪽의 강중(羌中)으로 진입하도록 했다. 위나라의 후장군 비요(費搖)와 옹주자사 곽회(郭淮)는 위연과 양계(陽谿)에서 싸웠는데, 위연은 곽회 등을 크게 격파시켜 전군사정서대장군 가절로 승진했으며 남정후(南鄭侯)에 봉해졌다.

위연은 항상 제갈양을 수행하여 출정하였다. 병사 1만 명을 요청하여 제갈양과는 다른길로 진출하여 동관(潼關)에서 만나 한신의 선례에 따르려고 했지만, 제갈양이 제지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위연은 항상 제갈양을 겁장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음을 한탄했다.

주석) 하후무(夏侯楙)가 안서장군으로 임명되어 장안 수비를 맡았다. 제갈양이 남정(南鄭)에서 부하들과 전략을 논의할 때, 위연은 이렇게 말했다. "듣건대 하후무는 젊고, 조조의 사위이며 겁장이이고 지모가 없다고 합니다. 지금 저에게 정예 5천명과 휴대할 식량 5천 석을 주신다면, 곧장 포중(褒中)을 뚫고 나가 진령산(秦嶺山)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자오곡(子午谷)에 당동하여 북쪽으로 간다면 열흘이 지나지 않아 장안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하후무는 저 위연이 갑자기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틀림없이 배를 타고 도주할 것입니다. 장안성 안에는 단지 어사와 경조태수만이 있을 뿐이므로, 횡문(橫門)에 있는 식량 저장 창고와 흩어지는 백성들의 곡물로 군사의 식량은 충분할 것입니다. 동쪽(위)이 병력을 모으는 데는 20일은 걸릴 것이므로 공이 사곡(斜谷)을 뚫고 나오면 반드시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한 번의 행동으로 함양(咸陽) 서쪽 지역을 평정할 수 있습니다."

제갈양은 이것을 위험한 계책이라고 판단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위연은 사졸을 잘 양성하였고 사람들을 뛰어넘는 용맹성이 있었으며, 또 성격이 오만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를 피했다. 오직 양의(楊儀)만은 위연에게 조금도양보하지 않았으므로, 위연은 매우 분개했는데, 마치 불과 물 같았다.

건흥 12년(234)에 제갈양이 북곡구(北谷口)로 출병하자, 위연이 선봉이 되었다. 제갈양의 진영으로부터 10리 떨어진 곳까지 나간 위연은 머리에 뿔이 나는 꿈을 꾸었다.

꿈 해몽가인 조직(趙直)에게 묻자, 조직은 위연을 속이며 말했다.

"기린은 뿔이 있지만 쓰지 않습니다. 이것은 싸우지 않고 적군이 자멸하려는 징조입니다."

조직은 물러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각(角)이라는 글자는 칼(刀)아래에 쓰였습니다. 머리 위에 칼을 쓰고 있으므로 매우 불길합니다.

가을, 제갈양이 질병의 악화로 위험한 지경에 이르자, 비밀리에 장사 양의, 사마 비의, 호군 강유 등과 자신이 죽은 후에 군사를 철수시키는 일에 관한 지도를 주었다. 위연에게는 적의 추격을 차단시키도록 하고, 강유에게는 그 앞에 위치하도록 했다. 만일 위연이 혹시라도 명령을 따리지 않을 경우에는 군대를 그대로 출발시키도록 했다. 제갈양이 세상을 떠난 후, 이 사실을 비밀로 하고 상을 발표하지 않았다. 양의는 비의에게 명하여 위연이 있는 곳으로 가서 태도를 살피도록 했다. 위연이 말했다.

"승상은 비록 죽었지만, 나는 건재합니다. 승상부에서 신임을 받은 관리들은 시신을 운반해 귀국하여 장례를 치러야 합니다. 나는 직접 병사들을 인솔하여 적을 공격할 것입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죽었다고 하여 천하의 일을 내팽개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나 위연이 어떤 사람인데, 양의의 지휘를 받아 후방을 끊는 장수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비의와 함께 떠날 부대와 남을 부대를 구분하고, 비의에게 편지를 써서 자기와 이름을 나란히 하여 장수들에게 알리도록 했다. 비의는 위연을 속여 말했다.

"저는 그대를 위해 돌아가 양장사(楊長史)를 이해시킬 것입니다. 장사는 문관으로 군사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지 못하므로 틀림없이 그대의 명령을 어기지 않을 것입니다."

비의가 문을 나와 말을 달려 떠난 후에야 위연은 비의를 보낸 것을 후회하고 추격했지만 잡을 수 없었다. 위연은 사람을 보내 양의 등을 살피도록 하여, 제갈양의 지도에 따라 군영들은 순서대로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위연은 대단히 분노하여 양의가 출발하기 전에 인솔하던 자신의 부하들을 먼저 남쪽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지나친 길은 불을 질러 다리를 끊어 놓았다.위연과 양의는 각자 서로 반역을 했다는 내용의 표를 올렸으며, 하루 사이에 긴급함을 알리는 문서가 조정으로 전해졌다. 유선은 시중 동윤과 유부장사(留府長史) 장완에게 이 일을 물었다. 장완과 동윤은 모두 양의를 보증하고 위연을 의심했다. 양의등은 산의 나무를 잘라 길을 여는 것을 밤낮으로 겸하여 역시 위연 군대의 뒤를 바짝 이었다. 위연은 먼저 도착하여 남곡구를 차지하고 병사들을 보내 양의 등을 역으로 공격했다. 양의 등은 하평(何平)에게앞에서 위연을 막도록 했다. 하평이 위연의 선봉부대에게 질책하여 말했다.

"제갈공명이 죽어 그 시신은 아직 식지도 않았거늘, 너희들은 어찌하여 감히 이런 행동을 하느냐!"

위연의 병사들은 잘못이 위연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명령에 따르는 자가 없었고 군대는 모두 흩어졌다. 위연은 혼자 아들 몇 명과 함께 도망쳐 한중으로 달아났다. 양의는 마대(馬岱)를 보내 추격하여 그의 머리를 베도록 했다. 위연의 머리가 양의에게 전해지자, 양의는 일어나 직접 그 머리를 밟고 말했다.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재능꾼아! 또 다시 나쁜 일을 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위연의 삼족을 멸했다. 당초 장완은 숙위(宿衛) 제군을 이끌고 위험을 피해 북쪽으로 갔는데, 몇 십 리 가서 위연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고 돌아왔다. 위연의 마음을 추측해 볼 때, 북쪽으로 가서 위나라에 항복하지 않고 남쪽으로 돌아온 것은 단지 양의 등을 제거하여 죽이려고 한것이다. 평상시 여러 장수들과 항상 의견이 달랐고, 그 당시 여론이 틀림없이 자신이 제갈양을 대신해야 한다고 하기를 바랐을 뿐 위연의 본래 뜻은 촉나라를 배반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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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 삼국지 - 당시의 고구려에 대해서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21:47

중국이 위,촉,오의 삼국으로 분열되어 있을 당시 한반도의 북쪽, 즉 만주에는 자랑스런 고구려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아래 글은 당시 고구려에 대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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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는 중국이 나라가 어지럽든 평온하든 간에 중국인들 사이에 상당히 많이 애용되어 왔습니다.

그 이유중를 보면 삼국지의 위나라 무제(조조)는 북방으로는 이민족들이 감히 쳐들어 올 생각조차도 못하게 만들었죠, 특히 채염을 흉노족의 왕으로부터 구해온 이야기는 그만큼의 조조의 위력을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하겠습니다.

때문에 꼭 그런건 아니지만, 중국이 이민족에게 위협을 받을때는 위나라를 중심으로 한 삼국지가 사랑을 받았죠.

나라가 평온할때는 정통성과 충효를 강조하는 분위기의 내용 즉 나관중이 쓴 촉나라 중심의 삼국지가 상당히 사랑을 받았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나쁘게 보면 삼국지 역시 중국인들의 중화사상의 최대반영이라고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물론 저도 삼국지를 사랑하고 많이 읽고 감동을 받고는 있으나 차칫 우리나라의 역사를 무시할 수 있는 오류에 빠지지 말았으면 합니다.

우리역사에서 삼국지와 관련이 많은 나라는 바로 고구려 입니다.

아마 우리민족이 세운국가중에서 가장 강력했었고, 그 정신이 조선이 개국될때 까지 이어져 옵니다.

소설상에는 등장하지 않고, 정사에 관구검에 의해 정복되어진 나라로만 등장하는 고구려...정말 중국인들의 말처럼 그렇게 허덥한 나라였을까요?

고구려는 중국에서 동이라고 불렀습니다. 즉 동쪽에 사는 오랑캐라는 뜻인데요...그에 반해 고구려에서는 중국을 욕심많은 지나족이라고 불렀습니다. 고구려 중심에서 본 오랑캐를 지칭하는 말이죠.

자 하나하나 읇어보겠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단군조선의 개승의식이 아주 강한 나라 였습니다. 후한 광무제와 그 이후의 왕들과 끝없이 싸움을 하고 있었는데요. 그 이유중에 하나는 바로 '단군조선의 영토회복'이었습니다. 특히 고구려의 태조왕때 오면 단군조선의 영토를 거의 대부분 회복하지만 태조왕 사후 나라안의 불안으로 인해 결국 상당부분 상실하고 맙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끝없이 투쟁이 계속되는 데요.

바로 동천왕과 관구검의 싸움입니다. 관구검은 처음에는 고구려군에게 당하지만 나중에 상대방이 방심한 틈을 타서 교병지계를 멋지게 성공시켜 수도까지 함락을 시킵니다.

여기서 중국인들은 자기들이 이겼다고 주장합니다. 뭐 일리는 있으나 계속해서 고구려 군대는 투쟁을 계속하고 있었고, 후방에서 게릴라 전을 펼쳐 위나라의 군대의 보급로를 차단해 버리는등 상당한 데미지를 입히고 물러나게 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국난의 극복이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내실을 다져 훗날 위나라의 울지해가 쳐들어오자 멋지게 방어해 냅니다.

즉 위나라와의 싸움에서 독자적인 자주성과 강력한 군대를 바탕으로 위나라 조차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하게  한 후 울지해가 쳐들어오자 멋기게 격퇴해버리고 오히려 위나라 영토까지 치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고구려는 천손의 자손의식이 상당히 강했는데요, 후한말 채옹(동탁의 시신을 안고 울다가 왕윤에게 죽임을 당함)이 쓴 사서를 보면 '천자라는 칭호는 동이에서 유래되었다'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즉, 천자라는 칭호는 우리민족이 쓰던 말이었던 것이죠.

여기까진 그냥 이야기고요, 확실한건 바로 다음입니다.

제갈양이 쓴 병법과 그외의 책을 보면 이민족에 대해 기술한 부분이 있습니다.

제갈양의 것을 위주로 하되 종합해서 고구려에 대한 것을 여러분들께 어느정도 설명해 드리죠.. 적국과의 전투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제법 사실적으로 구사한 것이니 충분히 좋은 자료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동이(고구려)

동이는 산세가 험하고 성의 위치가 모두 높은 구릉지에 형성 되어 있다. 성마다 독립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지형자체가 천연방어선을 이루고 있다.

동이는 예와 충이 강한 민족이다. 왕은 어질고 백성은 강하며 윗사람을 깍듯이 섬길줄 안다. 특히 '맥'(고구려의 속국일듯)은 조세가 25분의 1이다. (그만큼 세율이 가볍다는 것은 귀족의 사치가 심하지 않고 백성도 풍족했다는 뜻) 산성이 여러개 떨어져 있고 한번 밀고 들어가더라도 다른 성의 군대는 독자적으로 움직이니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보급로를 차단당해 낭패를 본다.

게다가 백성들 역시 전시에는 단결을 잘해 함부로 이런민족을 함부로 도모하려 들다가는 큰 낭패를 보기 싶다.

정 이러한 민족을 도모하려거든 나라가 혼란해 지거든 첩자를 보내 어진신하를 제거하고, 백성과 왕 사이를 이간질 시켜라 그러면 쉽게 도모할 수 있을것이다.

원본 출처 : 공손홈 '안성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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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삼국의 관계

<출처: 역사부도>



위의 내용은 제갈양이 쓴 병법과 기타 자료를 종합한 것입니다. 위 내용의 경고대로 중국의 수나라 당나라는 고구려를 치다가 보급로가 차단되어 크게 낭패를 보았는데요, 역시 고구려는 중국의 대국과 견주어서 절대로 밀릴 것이 없는 강력한 우리나라의 역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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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손님 2011.08.07 15:0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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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중 고구려가 가장 강했던 국가는 아니었죠 그 전의 고조선만해도 3600년간 지속됐던 강대국이었는데 중국에도 3600년동안 지속된 국가가 있습니까? 주나라가 은나라에 반란을 일으킬때 고조선에 도움을 요청하죠
동이가 동쪽의 오랑캐라는 뜻은 아닙니다. 음양오행등 상당한 문화가 동이에서 온건이라는 기록이 중국에 많은데 오랑캐라 부르진 않았겠죠
우리 역사에 관한것은 연구할것이 많지만 주제에서 벗어나기에 줄입니다.
중요한것은 고구려 이후에도 그쪽 사람들이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는것..
From. Favicon of http://open2world.tistory.com 푸른빛 Open2World 2011.08.07 19:0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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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은 강대국으로 보기는 힘든게... 당시에는 국가의 중앙집권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대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부족 내지 연맹국가 단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동이'라는 표현은 결국 한족 중심의 중국인들이 만든 오랑캐를 일컫는 말은 맞습니다.
[논의] 제갈양은 왜 유비를 따라 나섰나?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21:39

삼국지 Ⅸ의 제갈양

삼국지 Ⅸ의 제갈양


본 내용은 연의에 입각한 글입니다. 삼국지를 읽었다면 꼭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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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의 최대 이벤트이자, 뛰어난 사람을 얻기위해 스스로 몸을 구부리는 유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 일화가 있습니다. 바로 삼고초려입니다. 이 내용은 제갈양이 그의 출사표에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유비가 '미천한 자신을 찾아와줘서 그 은혜가 하늘과 같다'라고 표현하고 있죠.

비단 유비 뿐만 아니라 예부터 천하의 대인을 찾아갈때는 그가 비록 뛰어난 군주이더라도 스스로 찾아가서 몸을 굽히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주나라의 무왕이 태공망을 찾아갈때도 그러했죠. 또한 조조 역시 삼고초려를 했습니다.

특히 연의를 보면 제갈양은 유비가 천하를 통일할 운이 아님을 스스로 깨닫고 유비를 피하다 나중에 유비와 함께 나서면서 '나도 범증의 운명을 겪게 되는구나'하며 되뇌이는 부분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 부분은 이문열의 삼국지를 참조)

물론, 유비의 간곡한 청이 있었고, 유비 역시 천하의 기재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한실부흥을 위한다는 일념으로 제갈양에게 고개를 숙여 가르침을 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제갈량이 뛰어난 천하의 기재가 왜 그때까지 초야에 묻혀 지냈을까요? 다시 말해서 가까운 형주의 유표나 오나라의 손책, 손권이 출사를 부탁하지 않았냐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면 유비를 따라나가지 않더라도 하다못해 손권이라도 찾아갔으면 확실한 자리 하나를 마련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역시 제갈양이 출사보다 은둔 생활을 더 선호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연의에서 언급하듯이 자신의 대의를 실현시킬 수 있는 군주를 기다렸던 것일까요?

여기서 조금 다른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제갈량은 당시 추녀로 널리 알려진 황승언의 딸과 결혼을 합니다. 여기서 제갈량은 왜 세상에 추녀로 알려진 황승언의 딸과 결혼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 보고자 합니다.

실상 황승언은 형주의 유지 집안이었습니다. 제갈양이 황승언의 박식함에 매료되어 결혼을 했다는 설이 있지만 이는 큰 설득력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보다는 아무 기반도 없이 능력만 좋은 제갈량이 출세하기 위한 인맥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 황승언의 딸과 결혼을 했다는 추측이 더 일리가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제갈량이 은둔 생활을 출사보다 선호했거나 연의에서 처럼 대의를 실현시킬 군주를 기다렸다는 설명의 근거는 그 힘을 잃게 됩니다. 오히려 제갈량은 출사를 위해 어느정도 필사적이었다는 해석을 할 수 있죠. 물론, 이것 하나만 가지고 그렇게 단정짓기는 곤란합니다. 이에 대해서 소설 삼국지를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합시다.

제갈량이 세상에 출사할 뜻이 있었다는 사실은 소설 삼국지의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중 한가지는 바로 유비가 신야목으로 있을때 제갈양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유비를 찾아와 신야의 병력을 증강시킬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로 호구조사를 실시할 것을 알려주고 돌아가는 일화입니다. 훗날 유비는 직접 제갈양을 세번이나 찾아가서 호구조사를 실시할 것을 알려준 사람이 제갈량를 알아보고 그 때 그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실수를 탓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두 번째
는 제갈량이 자신을 관중과 악의에 비견하고 다닌 사실입니다. 초야에 묻혀서 세상을 방관할 사람 같았으면 대게 천하대세를 논하는 것에서 그치거나 아니면 자신을 찾는 군주를 신나게 망신주고 도망치거나 아예 숨어버립니다. 즉 자신이 누구니 날 알아달라는 말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 예형이 그에 해당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것입니다.

세 번째
는 연의에서 미화되긴 했지만 제갈양이 제법 뛰어난 군사적 지략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후대 사람들 중 그의 군단 지휘 능력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사람이 많기는 하나 수적으로 불리한 촉의 군대로 위나라의 대군을 상대로 밀고 들어가는 대담함과 치밀함 그리고 기산을 중심으로 한 그의 여러 전투에서의 지휘 능력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가 쓴 병법은 그가 평소에 병법연구에 관심이 많았다는 한 증거이며, 이는 나중에 출사하며 이를 쓰기위해 대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상에서 제가 연의를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아마 제갈양은 은둔하기 보다는 벌써부터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떨치고 싶은 마음이 많았던 인물로 생각됩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제갈량은 출사에 분명히 뜻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출사를 위해 열심히 노력했고 천하의 기재였던 그가 왜 손권이나 유표를 찾아가지 않았을까요? 역시 연의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손권과 유표는 그의 대의를 실현시켜 줄 수 있을만한 군주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표는 이미 채씨 일족이 상당한 위력을 떨치고 있어 자기가 찾아가 봤자 그렇게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고, 손권 역시 삼강의 험준함과 함께 주유, 노숙, 장소 등 뛰어난 전략가와 지략가들이 많이 포진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틈바구니에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제갈량으로서도 상당한 고전을 해야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유비의 경우를 보면 무장은 충분하나 그들을 전략적으로 이끌수 있는 군사(軍師)가 없었으며 그다지 뛰어난 문관 역시 없었습니다. 사마휘의 평가대로 '백면서생'에 불과한 인물들이 다수였죠. 때문에 제갈양이 직접가면 치열한 노력없이도 그의 천하관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유비군에서 상당한 위치를 점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제갈양은 은둔하기 보다는 오히려 세상에 출사하기를 학수 고대했습니다. 그럼에도 결국 유비에게 임관하게 된 이유는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유비 진형이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데 있어 비교적 수월했기 때문이라고 조심스럽게 결론을 내릴 수 있겠습니다.

원본 출처: 공손홈 '안성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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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삼국지 - 정사 "주유전"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21:33

삼국지 Ⅸ의 주유

삼국지 Ⅸ의 주유



김원중의 정사 삼국지에 있는 '주유전'입니다. 관심있으신 분들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앞서 말씀드리지만 연의와는 내용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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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전

주유는 자가 공근이며 여강군 서현사람이다. 당조부 주경과 주경의 아들 주충은 모두 한나라 태위를 지냈다. 부친 주이는 낙양현의 령을 지냈다.

주유는 건강하고 자태와 용모가 뛰어났다. 처음에 손견이 의병을 일으켜 동탁을 토벌할 때, 그는 집을 서현으로 옮겼다. 손견의 아들 손책은 주유와 나이가 같았으며, 두 사람의 우정은 남달랐다. 주유는 길 남쪽의 큰 저택을 손책에게 주고 방으로 들어가 그의 모친에게 배례했으며, 서로 있는것과 없는 것을 융통하며 돕고 살았다. 주유의 당부 주상이 단양태수로 있었는데 주유는 그를 찾아가 안부를 물었다. 마침 손책이 역양까지 있었으므로 급히 편지를 써서 주유에게 알렸다. 주유는 병사를 인솔하여 손책을 맞이했다. 손책은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나는 그대를 얻었으니, 전쟁은 순조롭게 될 것이오."

주유는 그래서 손책을 따라 횡강과 당리를 공격하여 모두 함락시켰다. 그리고 또 강을 건너 말릉을 공격하고, 작융과 설례를 격파시켰으며, 방향을 돌려 호숙과 강승을 공격하고 곡아로 진입하자 유요는 달아났으며, 손책의 병사는 이미 수만 명이 되었다. 그래서 손책은 주유에게 말했다.

"나는 이 병력이면 오국과 회계군을 취하고 산월을 평정하기에 충분하오. 그대는 돌아가서 단양을 지키시오."

주유는 돌아왔다. 오래지 않아, 원술이 주상을 대신할 태수로 사촌 동생 원윤을 보냈으므로 주유는 주상과 함께 수춘으로 돌아왔다. 원술은 주유를 부장으로 임용하려고 했지만, 주유는 원술에게는 끝내 성취할 것이 없음을 보았기 때문에 거소현의 장이 되기를 구하여서 길을 빌려 강동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며, 원술은 이에 동의했다. 그래서 주유는 거소에서 오로 돌아왔다. 이 해가 건안 3년(198)이다. 손책은 직접 주유를 영접하고, 건위중?"아장을 수여하고 즉시 병사 2천명과 기마 50필을 주었다. 주유는 당시 24세였고, 오군 사람들은 모두 그를 주랑이라고 불렀다. 주유의 은덕과 신의는 여강에서 빛났다. 손책은 그를 지방으로 내보내 우저를 지키도록 하고, 후에 춘곡현의 장을 겸임하도록 했다. 오래지 않아, 손책이 형주를 취하려고 할때, 주유를 중호군으로 임명하고 강하태수를 겸임하도록 했다. 주유는 손책을 따라 환현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당시 교공의 두 딸을 포로로 잡았는데, 모두 절색이었다. 손책 자신은 대교를 아내로 맞이했고, 주유는 소교를 아내로 맞이했다. 또 주유는 심양으로 진격하여 유훈을 격파시켰으며, 강하를 토벌하고 예장과 여릉으로 돌아와 평정하고 파구에 남아서 지켰다.

5년(200)에 손책이 죽자, 손권이 일을 통솔했다. 주유는 병사를 이끌고 조상하러 갔다가 오에 머물러 중호군으로써 장사 장소와 함께 모든 일을 관장했다.

11년(206), 그는 손유 등을 인솔하여 마둔과 보둔 두 주둔지를 토벌하고, 그곳의 우두머리의 목을 베어 나무에 매달았으며, 1만여 명을 생포해 군사를 돌려 궁정을 지켰다. 강하태수 황조가 부장 등룡을 보내 병사 수천명을 이끌고 시상으로 진입하도록 했다. 주유는 추격하여 토벌했으며, 등룡을 생포해 오군으로 보냈다.

13년(209) 봄, 손권이 강하를 토벌하고, 주유를 전부대독으로 임명했다.

이 해 9월, 조조가 형주를 침공하자, 유종은 수하의 사람들을 들어 투항했다. 조조는 그의 수군을 얻게 되었으며, 그 결과 수병과 보병은 수십 만 명이나 되었다. 오의 장수들은 이 소식을 듣고 모두 두려워 했다. 손권은 신하들을 불러 모아서 계책을 물었다. 논의하는 자들은 모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조는 승냥이와 호랑이처럼 사악하고 무섭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나라 승상의 명의에 기대어 천자를 끼고 사방을 정벌하고 움직이면서 조정의 뜻이라고 하는데, 오늘 그에게 저항한다면 일은 더욱 순조롭지 못할 것입니다. 게다가 장군에게 있어서 유리한 형세로 조조를 대항할 수있습니다. 유표는 수군을 훈련시켰고 몽충이나 투함이 수천 대 인데, 조조가 이것을 모두 포획하여 장강가에 늘어놓고 아울러 보병도 움직여 수군과 육군이 함께 내려온다면, 이때는 장강이 위험하게 되고, 이미 우리와 공동으로 차지하게 될것입니다. 그러나 쌍방의 세력은 현저하게 차이가 나므로 또 논할 수없습니다. 가장 좋은것은 그를 맞아들이는 것이라고 저희들은 생각합니다."

주유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조조는 비록 한나라 승상의 명의에 의탁하고 있지만, 사실은 한나라 조정의 적입니다. 장군은 신명스런 무위와 웅대한 재략을 갖고 있고, 겸하여 아버지와 형의 위세이 기대어 강동을 할거하고 수천 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병사는 정예이고 식량은 풍족하며 영웅들은 공업을 이루기를 원하고 있으므로, 오히려 웅당 천하를 횡행하며 한왕조를 위해 잔폭하고 더러운 것을 제거할 때입니다. 게다가 조조는 직접 사지로 보내져왔는데, 영접할 수 있겠습니까? 장군을 위해 헤아려보기를 요청합니다. 지금 북방의 영토를 이미 안정시켰고 조조에게 내부의 근심이 없어 시일을 늘려 오랫동안 전쟁터로 와서 싸울 수 있다고 하더라도 또 우리와 수면 위에서 싸워 이길 수 있습니까? 지금 북쪽 땅은 아직 평안하지 못하고, 게다가 마초와한수가 오히려 동관 서쪽에 있으면서 조조의 후환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병을 버리고 수군에 기대어 오나 월과 다투는 것은 본래중원에서는 잘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또 현재는 날씨가 추워 말에게 먹일꼴이 없고, 중원의 병사들에게 멀리 강호의 땅을 건너도록 하였으므로 물과 땅에 익숙지 못하여 반드시 질병이 생길 것입니다. 이러한 네 가지는 용병의 근심거리입니다.그러나 조조는 함부러 행동했습니다. 장군께서 조조를 잡으려고 한다면, 오늘이 마땅합니다. 저는 정예병사 3만 명을 받아서 하구로 나아가 주둔하기를 원합니다. 장군을 위해 조조를 무찌를 것을확신합니다."

손권이 말했다.

"사악한 적이 한왕실을 페하고 스스로 황제로 일어서러고 한 것은 오래되었소. 단지 원씨 두명, 여포, 유표와 남나을 꺼러했을 뿐이요. 지금 몇몇 영웅은 이미 소멸되었고, 오직 나만 여전히 남아있소. 나는 사악한 적과 양립할 수 없는 형세요. 그대가 당연히 공격해야 한다고 한 것은 나의 생각과 매우 부합하는 것이며, 이는 하늘이 그대를 나에게 준 것이오."

이때 유비는 조조에게 격파되어 병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강을 건너려고 생각하였는데, 당양에서 노숙과 만나 함께 상의하고 계획하여 나아가 하구에 주둔하고는 제갈양을 파견하여 손권을 알현하도록 했다. 손궈은 곧 주유와 정보 등을 파견하여 유비와 힘을 합쳐 조조에게 대항하도록 했다. 두군대는 적벽에서 만났다. 당시 조조의 병사들은 이미 질병에 걸려 있었으므로, 처음 한 차례 싸움에서 조조의 군대는 패하여 장강 북쪽에 주둔했다. 주유 등은 남쪽 해안가에 있었다. 주유의 부장 황개가 말했다.

"지금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기 때문에 오랜 시간 싸우는 것은 곤란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조조 군대의 배는 앞뒤가 서로 이어져 있으므로 불을 질러 달아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유는 몽충과 투함 수십 척을 취해 풀을 가득 싣고 그 가운데에 기름을 부어 휘장을 씌우고, 위에 아기를 세웠다. 그리고 먼저 편지를 써서조조에게 거짓으로 항복한다고 알렸다. 또 날랜 배를 미리 준비하여 각각 큰 배의 뒤에 매고 순서대로함께 전진했다. 조조 군대의 관리와 병사들은 모두 목을 빼고 바라보며 황개가 투항한다고 말했다. 황개는 여러 배를 풀어 동시에 불을 질렀다. 당시는 바람이 매우 사나웠으므로 해안 위의 진에까지 불길이 번졌다. 순식간에 연기와 불꽃이 하늘 가득 퍼졌고, 불에 타죽거나 익사한 병사와 말의 수는 헤아릴수 없었다. 조조의 군대는 결국 패하여군사를 돌려 남군을 지켰다. 유비는 주유 등과 함께 또 힘을 합쳐 추격했다. 조조는 조인 등을 남겨 강릉성을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곧장 북쪽으로 돌아갔다.

주유와 정보는 또 남군으로 전진하여 조인과 서로 대치하였는데, 각군은 대강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병사들이 아직 싸움을 하기도 전에 주유는 감녕을 보내 공격하며 포위해 들어갔다. 감녕은 주유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주유는 여몽의 계획을 사용하여 능통을 남겨 그 뒤를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여몽과 함께 감녕을 구하러 갔다. 감녕의 포위가 풀린 후, 주유는 강을 건너 북쪽 해안에 주둔하고 조인과 대전할 날을 정했다. 주유는 직접 말을 타고 싸움을 지휘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오른쪽 겨드랑이를 맞아 상처가 대단히 심했으므로 곧 바로 돌아왔다. 후에 조인은 주유가 일어나지 못하고누워있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를 이끌고 진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주유는 직접 일어나서 군영을 시찰하고 관리와 병사들을 격려했다. 조인은 이 때문에 후퇴했다.

손권은 주유를 편장군으로 제수하고, 남군태수를 겸임하도록 했다. 하준·한창·유양·주릉을 그의 봉읍으로 삼게 하고, 강릉에 주둔하여 지키도록 했다. 유비는 좌장군의 신분으로 형주목을 겸임하고 공안에 주둔했다. 유비가 경까지 와서 손권을 알현했을 때, 주유가 상소를 올려 말했다.

유비는 용맹하여 영웅다운 자태를 갖고 있으며, 관우와 장비처럼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를 끼고 있으므로 틀림없이 오랫동안 몸을 굽혀 다른 사람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유비를 오군으로 옮겨 놓고 그를 위해 궁전을 성대하게 짓고 미녀와 진귀한 완구를 많이 주어서 그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 관우와 장비 이 두 사람을 나누어 각기 한쪽에 배치하고 저같은 자로 하여금 그들을 지휘하여 싸우게 한다면, 대사는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토지를 나누어 주어서 그들이 기반을 세우는 것을 도와주고, 이 세 사람을 모아 함께 변방 땅에 있도록 한다면, 아마 교룡이 구름과 비를 얻어서 끝내 연못 속의 물건이 안되는 것과 같이 될 것입니다.

손권은 조조가 북방에 있기 때문에 응당 영웅들을 널리 촙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유비를 끝까지 제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주유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당시 유장은 익주목이 임명되었는데, 밖으로는 장로의 약탈과 침략이 있었다. 주유는 경으로 가서 손권을 알현하고 말했다.

"지금 조조는 방금 좌절과 고통을 당하여 마침 마음속으로 걱정하고 있으므로 아직은 장군과 병사를 이어서 서로 싸우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저는 분위장군과 함께 촉을 취하러 나가기를 원합니다. 촉을 얻고 장로를 병합한 후에 분위장군을 남겨 그 땅을 단단히 지키도록 한다면, 마초와 동맹관계를 맺을 것입니다. 저는 돌아와 장군과 함께 양양을 점거하여 조조를 추격한다면, 북방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손권은 주유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나 주유는 강릉으로 돌아와 행장준비를 하고 파구를 지날 때 병사했다. 당시 그는 36세였다. 손궈은 소복을 입고 애도하였는데, 주의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주유의 영구가 오나라로 돌아오자, 손권은 또 무호로 가서 맞이했으며, 모든 비용을 일체 공급했다. 후에 명령을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인이 된 장군 주유와 정보의 집안에 있는 손님들에게는 부세와요역을 묻지 말라.

당초 주유는 손책에게 좋은 친구로 대우받았고, 태비 또한 손권으로 하여금 형의 예로써 받들도록 했다. 이때 손권의 직위는 장군이었고, 그의 부장들과 빈객들의 그에 대한 예절은 오히려 간단했지만, 주유만은 유독 일찍부터 존경을 다하여 신하로써의 예절을 지켰다. 주유는 성격이 너그럽고 넓어서 대체로 인심을 얻었는데, 오직 정보와는 화해롭지 못했다.

주유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정통하였다. 비록 술을 많이 마신 후일지라도 연주한 음악에 틀린 부분이 있으면 주유는 반드시 그것을 알아냈고, 그것을 알아내면 반드시 돌아보았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가요에서 이렇게 말했다.

"곡에 잘못된 점이 있으면, 주랑이 돌아본다."

주유는 아들 둘에 딸 하나가 있었다. 딸의 배필은 태자 손등이었다. 아들 주순은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여 기도위로 제수되었고 주유의 풍모가 있었는데, 요절했다. 주순의 동생 주윤은 처음에 흥업도위로 임명되었고 종실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며, 병사 1천 명을 인솔하여 공안에 주둔했다. 황룡원년(229), 도향후로 봉해졌으며, 후에 죄를 범하여 여릉군으로 옮겼다.

적오 2년(239), 제갈근·보즐이 이름을 나란히 하여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인이 된 장군 주유의 아들 주윤은 지나친 칭찬을 받아 장군으로 봉해짐을 받았었습니다. 그는 특별히 두터운 대우를 받을 수 없을때는 공을 세우려고 생각하였으나, 도리어 방종하고 사용에 집착하여 매우 빨리 죄를지어 처벌을 초대하게 되었습니다. 신들의 사사로운 생각으로는, 주유는 과거 총애와 신임을 받았고, 안으로 들어오면 심복이 되었고, 밖으로 나가면 보좌하는 장수가 되었으며, 명을 받아 출정하면 죽음을 보고 돌아오는 것처럼 했습니다. 때문에 오림(적벽)에서 조조를 패배시키고, 영도(강릉)에서 조인을 도망치게하여 국가의 위험과 은덕을 떨쳐 전국이 진동하였으며 우매한 만형 중에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도록 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주의 방숙, 한의 한신인 영포일지라도 진실로 그를 뛰어 넘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대체로 적군을 꺾고 국가의 어려움을 막아낸 신하로서 옛날부터 제왕들에게 귀하게 여겨지고 중요시되지 않은자는 없었습니다. 때문에 한고조는 작위를 봉하는 서약서에서 말하기를, '설사 황하가 허리띠처럼 되고, 태산이 마모된 돌처럼 되더라도 그들의 봉국은 영원히 존재하도록 하여 후배 자손들에게 전하도록 한다'고 했습니다. 아울러 붉은 글로써 맹서 의식을 융숭히 하고, 종묘속에 넣어 두고 영원히 전해지게 했습니다. 이것은 공신의 후배들로 하여금 대대로 계승하여 자손뿐만 아니라 더욱 먼 후대까지도 관심을 기울려 신하의 공덕에 보답하고 표창하려는 것입니다. 간절하게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려고 하는 것은 후세의 사람들에게 권하고 경계하여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신하가 되어 죽어도 후회가 없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하물며 주유가 죽은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그의 아들 주윤을 강등시켜 평민이 되게 하였으니, 더욱더 슬픕니다. 저희들의 생각으로는, 폐하께서는 고대의 일을 고찰하여 정사를 영명하게 처리하며, 제후국을 일으키고 후계자를 세우는 것을 매우 중시하고 있으므로 주윤을 위해 청하니, 그의 죄를 사면시켜 주시고 병사들을 돌려주고 작위를 회복시켜 주어서 아침을 잘못알린 닭으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울 수 있도록 하고, 죄지은 신하도 이후에 효락을 펼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손권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심복이 되어 이전에공을 세우고 나의 함께 협력하여 일을 한 자 중에는 주공근이 있었는데, 확실히 잊지 못하오, 옛날 주윤이 나이가 어렸으며, 처음에는 공로가 없었는데도 정예 병사를 받아 지휘하고 왕후 장군의 작위로 봉해진 것은 주공근을 생각하여 주윤에게 미쳤던 것이오. 그런데 주윤은 이러한 것에 기대어 주색에 빠져 스스로 방자하였으며, 앞뒤로 몇 차례 말하여 깨우치게 하였지만, 일찍이 고친 일이 없었소. 나와 주공근과의 정의는 당신들 두 사람과의 것과 똑같은데, 주윤이 성취하는 것이 있기를 바라는 심정이 어찌 멈춰 있겠소? 주윤의 죄악을 구명하여 즉시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은 그로 하여금 고통을 받게 하여 스스로 알도록 하려는 것이오. 지금 당신들 두 사람이 한고조의 황하와 태산의 맹서를 간절히 인용하니, 나는 부끄럽소. 비록 나의 덕행은 한고조와 같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오. 주공근의 자식이고 두 사람이 중간에 있으니, 고치도록 할 수 있다면 또한 무슨 근심이 있겠소!"

제갈근과 보즐은 누차 표를 올렸고, 주연과 전종 또한 함께 진술하여 요청하였으므로 손권은 비로서 이를 허락했다. 이때 주유는 병으로 죽었다.

주유의 조카 주준 역시 주유의 탁월한 공로 때문에 편장군으로 임명되었고, 관리와 병사 1천 명을 인솔하게 되었다. 주준이 죽자, 전종은 표를 올려 주준의 아들 주호를 장수로 임명하려 했으나 손권이 말했다.

"이전에 조조를 달아나게 하고 형주를 개척한 것은 모두 주공근이 한일이니, 영원히 그를 잊지 않을 것이다. 처음 주준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때 주호를 임용하려고 했지만, 주호의 품성과 행실이 음험하다는 것을 들었다. 그를 관리로 임명하면 화란을 만들 것이기 때문에 이 생각을 멈추었다. 그러나 내가 주공근을생각하고 있는 것이 어찌 그침이 있겠는가?"


출처: 김원중 옮김의 정사삼국지.

p.s. 주유에게 잘못 한일이 있다면 그것은 공명과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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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연의에서와 같이 조조는 과연 악인인가?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21:20

삼국지 Ⅸ의 조조

삼국지 Ⅸ의 조조



나관중의 삼국지 연의는 조조의 일거수일투족을 부정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조조를 난세의 악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은인 여백사를 사살

2. 군량미 부족시 당시 담당관이던 왕후에게 책임을 전가

3. 적벽대전에 앞서 자작한 시를 평가한 유복을 찔러 죽임

4. 자기가 자고 있던 중에 누구라도 자기 가까이에 오지 말라고 하고 측근이 이불을 덮어주자 칼로 베어 죽이고 난 뒤 깨어나서는 모른 체하면서 울며 슬퍼하는 행위

5. 유비 전쟁 패배시 아이들 눈물 흘림, 조조 전쟁 패배시 아이들 손뼉치며 기뻐함

6. 서주에서의 양민 학살

조조는 삼국지 연의에서 이미 '악인'으로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사실 조조는 단순히 '악인'은 아니었다. 조조의 능력은 당시 어느 군주보다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조조는 인재 등용에 뛰어났다. 자신에게 반역을 하든 적을 도왔든 간에 능력이 있다면 모든 죄를 용서하고 중직이 임명했다.

조조가 세운 업적을 봤을때도 조조는 중국 군주들의 모범, 가히 명군이라 할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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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삼국지 - 검각 전투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21:04

검각 (劍閣)

검각 (劍閣)

검각(劍閣)


촉이 마지막으로 치룬 전투입니다. 마지막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허무한 감도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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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각은 익주 재동군 한덕현에 있었으며, 잔도와 관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현재는 사천성 검각현 북쪽에 위치해 있다.

경요 6년(263)에 강유가 유선에게 표를 올렸다.

「듣건대, 종회는 관중에서 병사들을 훈련시켜 우리를 공격하여 취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응당 장익과 요화를 보내 각 군대를 지휘하여 양안관구(陽安關口)와 음평교두(陰平橋頭)로 나누어 지키도록 하여 미연에 방지해야만 합니다.」

황호는 귀신이나 미신의 말을 신용하고, 적군은 끝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여 우선에게 이 일을 진행시키지 말라고 했다. 신하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종회가 낙곡으로 향하고, 등애가 답중으로 진입한 연후에 비로소 우거기(右車騎) 요화를 답중으로 보내 강유의 원군이 되도록 했으며, 좌거기 장익과 보국대장군 동궐(童厥) 등은 양안관구로 가서 여러 진영의 밖에서 지원부대가 되도록 했다. 음평까지 왔을 때, 위나라 대장 제갈서가 건위(建威)로 향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므로 정지하고 그들을 기다렸다. 한 달 남짓 후, 강유는 등애에게 격파되어 음평으로 돌아와 주둔했다.

종회가 한,악 두 성을 공격하며 포위하고, 따로 장수를 보내 관구(關口;안양관구)로 진격하도록 하였으므로, 장서(蔣舒)는 성을 열고 나와 항복했고, 부첨(傅僉)은 저항하다 전사했다. 종회는 낙성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킬 수 없었는데, 관구가 이미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자 계속 달려 진격했다. 장익과 동궐이 한수에 도착하자, 강유와 요화 또한 음평을 버리고 후퇴했고, 마침 장익,동궐과 회합하여 모두 검각(劍閣)으로 물러나 지키며 종회에게 저항했다. 종회가 강유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공후(公侯)께서는 문무(文武)의 덕에 의지하고, 가슴속에는 세상을 덮을 지략이 있어 파촉,한중에서 공을 세워 명성이 전국에 퍼져, 먼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간에 당신에게 돌아가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항상 과거로 생각을 달려 일찍이 커다란 교화에 마음을 같이 했습니다. 오나라 계찰(季札)과 정나라의 자산(子産)은 그것으 좋은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강유는 답장을 하지 않고 진영을 배열하여 요새를 지켰다. 종회는 함락시킬 수 없었으며, 식량 운송하는 곳이 멀었으므로 장수들과 상의하여돌아갔다.

등애는 음평으로부터 경곡도(景谷道) 옆을 지나 촉 땅으로 침입하여,마침내 면죽에서 제갈첨을 격파시켰다. 유선이 등애에게 항복을 요청하였고, 등애는 진군하여 성도를 점거했다. 강유 등이 제갈첨이 패했다는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떤 사람은 유선이 성도를 굳게 지키려 한다고 들었고, 어떤 사람은 동쪽의 오로 들어가려 한다고 들었으며, 어떤 사람은 남쪽의 건녕으로 들어가려 한다고 들었다.그래서 강유는 군대를 이끌고 광한,처로부터 나아가 허실을 살폈다. 오래지 않아 유선의 칙령을 받고 곧 무기를 놓았다.

<정사삼국지>"강유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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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 삼국지 - 관우의 청룡언월도는 실재하는가?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20:55

게임 삼국지의 청룡언월도

게임 삼국지의 청룡언월도



언월도처럼 칼날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 있는 형태는 칼날이 일직선으로 반듯한 것보다 진보된 것이다.

칼날이 일직선인 경우에는 배고 찌르는 동작이 따로따로 이루어져야 하지만, 반달 모양으로 휘어져 있는 경우에는 휘두르는 동작 한번만으로 두 가지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태의 반달형 무기는 왕조춘의 말대로라면 송나라 때에야 등장했다고 하니 삼국시대에는 그런 무기가 개발되지 않은 상태였다고 말할수 있다.

그러므로 관우가 창에 칼을 얹은 무기를 사용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이 언월도는 아니였던 것이다. 실제 관우의 무기는 도의 종류 이기는 하되, 칼날이 일직선으로 반듯한 형태였을 것이다. 언월도라는 무기가 개발되기도 전에 관우가 그것을 들고 싸울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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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삼국지 - 치세에 실패한 순욱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20:52

삼국지 Ⅸ의 순욱

삼국지 Ⅸ의 순욱



'치세에 실패한 순욱'이라는 제목에 의아하시는 분이 있으실 것 같군요. 개인적으로 순욱은 시대, 즉 상황에 맞지 않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온 비운의 인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그 생각에 기초하여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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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욱은 탁월한 전략가로 조조가 "그대는 나의 장자방이로다"라고 할 정도였다. 조조의 성공은 순욱의 공이 컸다. 그러나 순욱은 그 시대의 입장에서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왜나하면 순욱은 조조를 헌신적으로 도우면서도 조조의 가문이 위나라를 건국하는 것에는 반대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한나라 헌제(獻帝)를 앞세워 한나라의 부흥운동을 도모한 적도 없는 사람이다. 다만 순욱은, 조조가 '주공(周公)의 도'를 본받아 천하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여 그 권력을 다시 헌제에 돌려주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조조의 권력을 다시 한 나라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은 순욱 자신이 더 잘 알았을 것이다.

순욱의 실패는 노선의 불분명함에 있었다. 순욱이 한나라의 부흥을 도모하려 한다고 해도 당시에는 믿을 사람도 없었을 것이므로 순욱은 차라리 조조의 가문이 위나라를 여는데 매진하는 것이 오히려 그 자신의 입장에서는 나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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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삼국지 정욱과 인육 (人肉)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20:48

삼국지 Ⅸ의 정욱

삼국지 Ⅸ의 정욱


이 글을 읽기 앞서 말씀드리지만 이 글의 내용은 나관중의 삼국지 연의나 진수의 삼국지 정사에도 나오지 않는 내용입니다. 세어(世語)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이지요.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부담없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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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은 조조의 모신으로 많은 공적을 세운다. 특히 초반에 진궁과 장막의 모반으로 조조는 근거지인 연주를 잃을뻔 했지만 순욱과 더불어 정욱의 기지 덕분에 위기를 모면하였다.

여포와 조조가 다툴때 군량이 부족하여 원소의 계략에 넘어가 조조가 원소에게 가족을 인질로 하여 동맹을 체결하려고 하자 이를 만류시킨다. 또한 헌제를 옹립하는데에도 대부분의 장수들이 반대하는데 반해서 순욱과 함께 적극 정욱은 적극 찬성하여 결국 조조가 대의명분을 얻고 중원의 실력자로 급부상한다. 유비가 조조의 휘하에 있을때는 그의 영웅적인 기질을 알아보고 항상 경계하며 결국 죽일것을 여러차례 종용하기도 하였다. 후에 유비가 원술을 정벌하러갈때에는 유비가 배반할것을 눈치채고 곽가와 함께 반대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여러차례 냉철하고 정확한 조언과 적의 계략을 꿰둟는 안목으로 조조가 군웅할거때에 주도권을 잡는데 큰 기여를 한다. 하지만 이렇듯 수 많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공의 지위에 오를 수 없었다고 한다. 세설신어에서는 그 이유를 과거에 조조가 식량때문에 곤란을 겪자 약간에 식량을 조달했는데 거기에 인육을 섞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신임을 잃고 결국 공에 자리에까지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정욱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난 아니라고 본다. 물론 인육이라면 상당히 잔혹하고 상상할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입장과 기준에서 볼때의 평가일뿐이다. 실제로 중국은 고대로부터 동아시아, 나아가서는 세계 제일의 문명국을 자처하며 주변의 민족들을 오랑캐나 야만족속으로 치부하였다.

그러나 정작 중국은 오랫동안 식인문화가 있었던 실로 야만스러운 민족이다. 식인문화는 중국 4천년 역사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한나라가 건국된 기원전 206년부터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까지, 중국에서는 식인의 기록이 220차례나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다.

또 법률로 '살육의 형' 을 만들어 죄인을 죽여 그것을 음식으로 만들어 먹게 하는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성인 공자는 '해(인체를 잘게 썰어 누룩과 소금에 절인 고기)'를 즐겨서 해 없이는 식사를 안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공자가 아끼던 제자 자로가 위나라의 신하로 있다가 왕위다툼에 휘말려 살해되고, 그의 시체는 잘게 토막내어져 해로 만들어지고 말았다. 이 해는 사자에 의해 공자의 식탁에까지 전해졌다. 이 일 후로 공자는 그렇게 좋아하던 해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후에 인육이 약재로도 쓰여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인체 각 부위의 약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수당시대에는 인육시장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또 인육을 즐겨 먹는 사람은 열전이 만들어져 기록되기도 하였다.

중국의 식인 풍습은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등 유명한 중국 고대의 소설에도 잘 나타나 있다. <삼국지>의 경우, 정사로 기록된 진수의 삼국지에는 유비가 즐겨먹은 음식이 인육으로 만든 포였다고 하며, 여포가 죽은 후 그 고기를 죄인들에게 먹였다고 한다. 소설 <수호지>에서는 인육으로 고기만두를 만들어 파는 악한이 등장하고, <서유기>에서는 고승(高僧)의 고기가 불로장생의 영약이라 하여 삼장법사가 끊임없이 요괴들의 공격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이렇듯 중국은 수천년동안 인육을 식량의 하나로 여기고 먹어왔다. 정욱이 조조에게 군량에 제공한 인육은 식인문화를 가진 당시에는 그리 큰 문제가 없는것이다. 더구나 극심한 흉년과 잦은 전쟁, 이미 파괴된 농촌 시스템등에 의해서 더이상 중국내의 식량을 통한 자급자족은 한계에 다달았다. 따라서 인육을 식량 대용으로 먹는것은 그리 이상할 것이 아니다. 즉, 맛으로 먹는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 먹는것이다.

따라서 정욱이 인육을 제공했기 때문에 조정에서 신임을 잃었다는 것은 당시의 정서나 정황으로 볼때 납득하기가 힘들다. 아마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이유가 있는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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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사이비드래곤 2010.05.08 04:5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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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인육이 정욱의 자기 고향마을 사람들을 싹 다 도륙해다 바친 인육이라 -_-;

인망을 잃었죠 ( ...)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라고
From. Favicon of http://open2world.tistory.com 푸른빛 Open2World 2010.05.08 17:2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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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정사에 언급이 없는 내용이기 때문에 진위를 판단하기 어려운 내용이라지만... 인육이라...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죠.
From. 살짝 수정을 가하셔야 할 내용이 있는듯. 2011.02.16 19:4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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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정사에서 그런 내용은 나오지가 않습니다. 날조된 겁니다. 저 부분은 수정하셔야 할듯.. 저런 내용은 어떠한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거라..
From. Favicon of http://open2world.tistory.com 푸른빛 Open2World 2011.03.03 15:1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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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위에 정사에 나오지 않는 내용이라고 명시가 되있습니다만... 세어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From. 안북장군 2012.03.30 17:1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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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에 화웅은 관우에게 죽었으나......

정사에서는 그렇지가 않던데......

정욱 역시도 불분명한......
From. Favicon of http://open2world.tistory.com 푸른빛 Open2World 2012.04.02 04:3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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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어라는 책 자체가 그냥 심심풀이 땅콩먹기 책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겁니다. :)
From. 김현준 2015.02.09 18:5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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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웅에 대한 죽음도 분분하죠 정사에선 하후돈이 죽였다고 나오던것 같던데 아마 그 당시 관우가 하후돈의 병사로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촉의 빠였던 나관중이 관우가 죽였다고 적었을수도.. 덕분에 이 술이 식기전에 적장의 목을 따오겠소라는 말이 거의 진실이 되가고있죠 ㅋㅋ
From. 인육하니가 2013.01.26 15:0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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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륙이 묵구십에요 ㅋㅋ
From. 이런게 문제입니다. 2013.11.08 12:2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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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빛님께서도 말했듯 '심심풀이 땅콩먹기 책 정도로 생각하시면 됨' 이정도의 글을 이런 자극적인 내용을 다루게 되면 그대로 믿게 되는게 일반적입니다. 과연 누가 이걸 회상할때 '정사에도 없고 연의에도 없는 내용인데 그냥 심심풀이 땅콩인데 정욱이 인육먹었데' 이렇게 될까요? 이런글이 블로그에 10군대만 있어도 이건 10년 뒤 기정 사실처럼 될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되어있을거라고 생각되지만요.
[인물] 삼국지 - 유선(劉禪)은 현군(賢君)이었다(?)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20:43

게임 삼국지 Ⅸ의 유선

유선 그는 아두인가? 아니면 현군인가?


유선.. 보통 삼국지에서 최악의 인물로 평가됩니다. 그 이유는 유비,관우,장비,제갈양 등의 인물들이 힘들게 세운 촉을 패망의 길로 이끈 주범으로 지목되기 때문이지요. 아래 글은 '삼국지 해제'에 있는 글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으로 유선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있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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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해제 발췌)

유선(207~271)은 촉한의 2대 황제이다. 자는 공사(公嗣). 어릴 때 자는 아두(阿斗)이며 유비의 아들이다. 나관중의 '삼국지'에서 동탁, 조조, 여포, 다음으로 가장 혹평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유선의 실체를 분석해보면 나관중의 결론과는 완전히 다르다. 나관중의 '삼국지'에서는 유선에 대하여 그 허물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첫째, 막 제위를 계승했을 때는 범용한 군주였다. 둘째, 제갈량이 죽은 후 환관 황호를 총애하고 주색에 빠져 조정의 정치가 나날이 부패해갔다. 셋째, 위나라의 대장 등애가 성도로 진격해왔을 때 위나라에 항복하고 안락공에 봉해졌다. 넷째, 사마소가 연회를 열고 촉 출신의 사람들에게 촉나라 음악을 연주하게 하니 모두 눈물을 흘렸는데 유선은 태연히 촉의 일들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상이 유선의 대표적인 허물들이다. 그러나 촉 황제 유선에 대해서는 좀더 다른 각도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첫째, 유선이 범용하다는 것도 납득하기는 어렵다. 유선은 성품이 부드럽고 그의 느역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런 인상을 준 듯하다. 제갈량의 말을 빌리면, 유선은 "천성적으로 인애(人愛)가 있으셔서 아랫사람을 소중이 다룬다"고 하였다. 유선은 성격이 원만하고 무리하지 않으며 무슨 말이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아량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매우 편안한 인상을 주는 것이 마치 유비와 비슷하다. 경우에 따라서 제나라의 성군이었던 환공에 비기기도 한다. 촉한의 소열황제 유비가 죽은 이후 유선이 황제의 자리에 있던 41년 동안 촉에는 정변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위나라 조정이나 오나라 조정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둘째, 흔히 지적되는 것으로 촉 황제 유선은 정치에 무관심하고 주색잡기에 빠져 있고 환관황호가 정권을 좌우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갈량이나 강유가 유선의 재가 없이 군대를 움직인 적은 없다. 그러나 군주들 가운데 유선만이 주색잡기에 몰두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다른 군주들이 더 심했다는 것이 정사에 많이 나타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유선만큼 현명한 신하와 재상들을 거느린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제갈량을 비롯 장완, 비의, 동윤 등이 대표 적인 예일 것이다. 사실 제갈량의 생전에 중국 정벌의 기치가 드높았으나 강유의 지속적인 패전 이후로 유선은 위나라의 정벌을 무모한 전략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유선의 입장에서는 위나라와 일방적인 전쟁의 과정에서 오나라에게만 어부지리의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셋째, 결사항전도 없이 위나라에 항복하고 안락공에 봉해진 문제이다. 이 점도 당시의 사정을 분석한다면 얼토당토 않은 논리이다. 현실적으로 당시 촉은 전쟁에 너무 지쳐 있었다. 한실 부흥이라는 명분으로 그 많은 세월을 버텨왔는데 더 이상은 어려웠을 수도 있다. 유선의 입장에서 본다면 지금 당장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아마 그의 마음 속에는 한실 부흥이라는 명분을 포기한 지가 오래 되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유선이 위군의 공격에 대하여 무리하게 끝까지 항전하려 한다면 위나라 대군을 이기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모두 '개죽음'으로 몰고갈 상황이었다. 유선은 무슨 일이든지 억지로 추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왕은 '촉기'에서 "나라를 온전히 지키는 것이 상책"이라고 평하면서 유선은 총명하고 사리에 밝은 왕이라고 적고 있다.

세상에는 인간이 거스르기 힘든 대세가 있는 법이다. 고래로 하늘의 뜻을 따라는 자는 흥하고 그렇지 않으면 망한다고 하였다.촉은 건국 후 40여년 동안 전쟁만 해왔고 상대는 촉이 정벌하기에는 너무나 강한 나라였다. 민심은 지속적이로 이반되고 위군의 침입은 더욱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서 결사항전을 하여 백성들과 군인들을 모두 죽이는 것은 폭군이나 할 짓이다.

어떤 의미에서 사람이 자신의 기득권이나 욕망을 보전하는 데 급급하는 것보다 더 잘못된 일은 없을 것이다. 천하의 대세에 순응하는 것도 중요한 인생의 덕목이다. 특히 군주는 제일 먼저 천하의 안정과 백성의 안위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부질없이 싸워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기보다는 어차피 이길 수 없고 함락이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투항하는 것인데, 그것을 한 가지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될 일이다.

넷째, 사마소가 연회를 열고 촉나라 음악을 연주하게 하니 모두 눈물을 흘렸는데 유선은 태연히 촉의 일들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한 문제이다. 이 점도 분석이 옳지 못하다. 사마소는 촉의 황제 유선을 크게 환대하여 안락공에 봉하였다. 사마소는 유선이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주택, 일상용품, 비단 1만 필, 노비 100여 명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유선을 따라온 유선의 아들 유요와 신하 번건, 초주, 극정 등에게도 각각 작위를 내렸다. 사마소는 대학자로 이름이 높고 촉이 투항하는데 힘을 아끼지 않았던 초주를 양성정후에 봉했다.

사마소가 유선을 불러서 속내를 떠보기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을 때 유선이 얼굴에 아무런 표정 없이 과거 촉의 일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 사실은 정답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조조가 유비를 떠보기 위해 같이 술을 마시면서 용의 이야기를 했을 때 천둥이 치자 유비가 깜짝 놀란 흉내를 내어 위기를 모면했던 상황가 별로 다르지 않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위나라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촉의 부흥운동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강유가 등애와 종회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위군을 자중지란에 빠지게 한 사건이 분명히 유선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유선의 입장에서는 그 동안 최선을 다하여 천하의 대권을 두고 싸웠고 이제는 패배하였기 때문에 그 당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명하게 지는 것도 대장부의 중요한 덕목이다. 당시 촉은 이민족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것이 아니고, 중원에 다시 흡수되는 과정에서 양측이 천하의 대권을 두고 싸우다가 패배했기 때문에 승복하면 그만이지 오직 자신만이 천하통일에 명분이 있다고 고집하는 것은 더욱 잘못된 일이었을 것이다.

이상의 소론으로 볼 때 나관중의 '삼국지'는 유선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가 결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유선은 한마디로 현군(賢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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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스펙터 2009.03.01 08:0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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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듣고 가네요. 하지만 역시 공감하기가 쉽지는 않네요. 특시 세번째와 네번째 논리대로라면 매국노의 대명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이완용의 매국행위 역시 '현명한 선택'으로 비추어질 것만 같아서 말이예요.
From. Favicon of http://open2world.tistory.com 푸른빛 Open2World 2009.03.04 18:5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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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서도 그 내용 뒤에 언급했지만, 당시 촉은 당시 조선 또는 대한제국처럼 이민족(다른 민족)에서 나라를 빼앗기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민족인 중원세력에 의해 통일 당한 것 뿐입니다. 민족 중심적인 시점에서 보았을 때, 촉과 위는 우리나라의 신라, 백제 같은 관계이지요. 이런 시점에서 볼때 이완용은 다른 민족에게 나라를 팔아버린 셈이니 엄연히 다른 경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민족 중심적 사고는 우리나라나 일본, 중국 같은 동아시아에서 강하게 드러나는 면이 있지요. 유럽이나 미국 등은 민족보다는 국가 중심적 사고가 강하고요. 국가 중심적 사고로 보면 유선의 경우를 이완용과 같은 맥락에 올려놓을 수 있지만, 민족 중심적 사고로 보면 엄연히 다른 경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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