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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제갈공명도 두려워했던 명장 "장합"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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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영화 삼국지의 장합


실제로 장합은 제갈양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고 합니다. 장합은 삼국지에서 제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장수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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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합(長合)은 한말(漢末)의병모집에 응모하여 황건적 토벌에 참가하여 기주자사(冀州刺史) 한복(韓馥)의 휘하에 있었는데, 원소가 간계로 기주를 빼앗자 그대로 주저않아 그를 섬겨 공손찬(公孫瓚)을 궤멸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가 앉은 나무는 그를 용납할 재목이 못 되었다. 그에게는 필연적으로 주인을 바꿔야 할 숙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합이 조조를 만나기까지...]

조조와 원소의 운명을 갈라놓은 유명한 관도(官渡)싸움 때이다.

원소는 오소(烏巢)에 군량을 쌓아놓고 순우경으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했다. 순우경이란 난폭하기만 한 한낱 필부에 불과했다. 마음이 안 놓인 장합은 원소에게 이렇게 건의를 했다.

"조조의 군사는 날래고 정예부대입니다. 순우경은 사람이 용렬해서 감당해낼지 걱정입니다. 조조군이 급습하면 틀림없이 지탱하지 못하고 패할 것입니다. 만약 순우경이 패하여 병량기지 오소를 잃는다면 장군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기동부대를 오소 남쪽으로 급파해서 조조군의 기습에 대비해야 합니다."

장합의 건의가 참모 곽도(郭圖)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도리어 악진의 손에 순우경의 목이 날아가고 오소를 빼앗겨 원소군은 궤멸적 타격을 입고 만 것이다.

책임을 뒤집어 쓸까 겁이난 곽도의 중상모략으로 장합은 주저없이 조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장합은 비로소 자기를 알아주는 주인을 만난 것이다.


[공명도 두려워 했다는 장합]

서기 215년 조조가 한중(漢中)의 장로(張魯)를 토벌해서 하후연(夏侯淵)과 더불어 그곳을 수비하게 되었다. 그러나 법정(法正)의 계책에 의하여 사령관이 하후연이 노장 황충의 손에 죽고 진중이 모두 아연실색하여 뒤숭숭해졌다. 이때 하후연의 사마(司馬)로 있던 곽회(郭淮)가 기지를 발휘했다.

"제장들은 조금도 걱정할 게 없다. 장 장군으로 말하면 국가의 명장으로 유비조차 두려워 하는 분이다. 지금 비록 위급하다 해도 장 장군이 계시니 동요하지 말고 본분을 다하라."

그리하여 죽은 하후연 대신 장합을 군주(軍主)로 추대했다. 동요하던 군심도 이로써 가라앉고 장합은 패군을 수습하여 무사히 한중에서 후퇴했다.

<위략(魏略)>에 이런 대목이 있다.

하후연이 비록 도독(都督: 총사령관)이었다고는 하지만 유비는 하후연을 가벼이 보고 장합을 두려워했다. 하후연을 죽였다는 보고를 받고 유비가 말했다.

"진짜(장합)를 잡아야지 하후연 정도를 뭣에 쓰겠단 말인가."

진수의 <장합전>에도 제갈량이 그를 어려워했다는 언급이 있는 것을 보면 지략이나 용맹 어느 면에서나 나무랄 데 없는 명장이었던 것 같다.


[장합의 최후]

서기 231년 사마의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고 나서부터는 촉군에 대한 공격책을 진언하는 장합을 번번이 물리쳐 그는 앙앙불락한 말년을 보냈다. 이 해 기산(祁山)에서 진격한 촉군을 견제하기 위해 사마의의 명으로 약양(略陽)까지 진출, 후퇴하는 촉군을 쫓다가 목문(木門)에 이르러 격전을 벌이던 중 촉군의 화살을 오른쪽 무릎에 맞아 진중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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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삼국지 - 정사 "공손찬전"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22:10

중국영화 삼국지의 공손찬

중국영화 삼국지의 공손찬


연의에서는 어느정도 양호하게 묘사되는 인물이나 정사에서는 평할 가치도 없는 인물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그래도 나름대로 매력있는 인물.. 백마장사라고도 불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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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찬전(公孫瓚傳)

공손찬은 자가 백규(伯珪)이다. 요서군(遼西郡) 영지현(令支縣) 사람으로, 요서 군현 문하의 서좌(書佐)에 임명되었다. 그는 용모가 당당하고 큰 목소리를 가졌으므로, 유태수는 그가 빼어난 인재임을 알아보고 자기 딸을 그의 아내로 삼도록 하고, 탁군 사람 노식(盧植)에게 보내어 경전을 배우도록 했다. 나중에 공손찬은 또 군의 낮은 벼슬아치가 되었다. 유태수(유기)가 법령을 어겨 정위로 불려갈 때, 법률에는 아랫사람이 가까이 가는 것을 금했지만, 공손찬은 수레몰이가 되어 스스로 고된 일을 맡았다. 유태수가 일남군(日南郡)으로 귀향갔을 때, 공손찬은 쌀과 고기를 준비해서 북망산(北芒山)에 올라가 선조들에게 제사지냈는데, 그는 술잔을 들어 축원하며 말했다.

"옛날에 저는 다른 사람의 아들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었으니 마땅히 일남군으로 가야 합니다. 일남군에는 독기가 가득하여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기에, 이곳에서 선조들에게 이별의 말씀을 올립니다."

그는 두 번 절하고 감정이 격앙되어 일어나니, 이 때 그의 행동을 본 사람들은 모두 찬탄하였다. 유태수는 가는 도중에 사면되어 돌아왔다. 공손찬은 효렴으로 추천되고 랑이 되었으며, 요동속국(遼東屬國:유주에 속하며 여섯 개의 성을 관한함)의 장사(長史:부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일찍이 수십 명의 기병을 이끌고 요새를 순시하러 갔다가 수백 명의 선비족 기병을 발견하였는데, 사람들이 없는 마을로 물러나 부하 기병에게 말했다.

"지금 우리들이 이들을 뚫고 나가지 못한다면 모두 죽을 것이다."

공손찬은 직접 창을 잡고, 그 양쪽의 칼날을 날카롭게 하여 말을 달려, 선비족 기병들을 찔러 몇 십 명을 죽이거나 부상입혔다. 그의 부하 기병 또한 절반이 목숨을 잃었지만, 결국 몸은 빠져나올 수 있었다. 선비족은 타격을 입은 이후로 두 번 다시 국경을 넘어 침입하지 못했다. 공손찬은 탁현의 현령으로 영전되었다.

한나라 광화 연간에 양주의 도적이 봉기했을 때, 조정에서는 유주의 돌격 기병대 3천 명을 징발하였으며, 공손찬에게 도독의 권한을 주어 그들을 지휘하도록 했다. 군대가 계중까지 갔을 때, 어양 사람 장순(張純)이 요서군 오환족의 구력거(丘力居) 등을 꼬여 반란을 일으켜 귀중에서 약탈을 하고, 자칭 장군이라 하면서 관리와 백성들을 협박하고 우북평군과 요서군 속국의 여러 성을 공격하였는데, 모두 그들에게 잔혹하게 무너졌다. 공손찬은 수라의 부대를 인솔하여 장순 등을 추격해서 공을 세우고 기도위로 승진되었다. 속국 오환족의 탐지왕(貪至王)이 부족 사람들을 이끌고 공손찬에게 투항했다. 공손찬은 또 중랑장으로 승진하고 도정후에 봉해졌고, 진군하여 요동속국에 주둔하며 선비족과 5~6년 동안 서로 공방전을 벌였다. 구력거 등이 청주, 서주, 유주, 기주를 약탈하여 이 네 주는 피해를 입었지만, 공손찬은 막아낼 수 없었다.

종정관(宗正官)은 도덕과 인의를 갖춘 사람으로서 옛날 유주자사로 있으면서 그의 은혜와 신의를 널리 전하였으므로 오랑캐들조차도 그에게 복종하였으니, 만일 그에게 진압하고 달래도록 한다면 병사들을 수고롭게 하지 않으면서 그 지역을 안정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정에서는 판단했다. 그래서 유우를 유주목으로 임명했다. 유우는 임용된 후 선비족에게 사람을 보내어 반역을 했을 경우의 이해관계를 설명하고, 장군의 머리를 보내도록 요구해했다. 구력거 등은 유우가 왔다는 말을 듣고 매우 즐거워했으며, 각각 통역을 하여 자발적으로 귀순을 요청했다. 공손찬은 유우의 공로를 질시하였으므로, 몰래 사람을 보내어 오랑캐의 사자를 죽이도록 했다. 선비족은 이 일을 알고 샛길로 달려와서 유우를 만났다. 유우는 상주하여 여러 곳의 주둔병을 철수시키고, 단지 공손찬이 이끄는 보병과 기병 1만 명만 남겨 우북평을 지키도록 했다. 장순은 처자식을 버리고 선비족 속으로 달려왔지만, 식객 왕정(王政)에게 살해되어 그의 머리가 유우에게 보내졌으며, 왕정은 열후에 봉해졌다. 유우는 공을 세웠으므로 태위에 임명되었고, 양분후(襄奮侯)에 봉해졌다. 이 때 마침, 동탁이 낙양으로 와서 유우를 대사마로 승진시키고, 공손찬을 분무장군으로 임명하고 계후로 봉했다.

관동지역에서 의군이 일어나자, 동탁은 황제를 협박하여 서쪽(장안)으로 수도를 옮기고, 유우를 불러 태부로 임명했지만, 길이 막혀서 이 명령이 전달될 수 없었다. 원소와 한복은 상의하여 황제가 간신들에게 제어당하고 있어 천하의 사람들은 마음을 귀의할 곳이 없는데, 유우는 황족으로 평판이 높고 인망이 있으니, 유우를 황제로 추대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사자를 보내 유우를 만났지만, 유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소 등은 유우에게 상서 일을 맡아(정치적 책임자가 된 것), 단독으로 일을 처리하는 권한을 얻어 관직에 임명하도록 권유했지만, 유우는 승낙하지 않았으며, 원소 등과 우호관계만 유지했다.

유우의 아들 유화(劉和)는 시중이 되어 장안에 머물고 있었다. 천자는 동도(東都:낙양)으로 돌아오려는 생각으로 유화에게, 동탁에게서 거짓으로 도망쳐 몰래 무관(武關)에서 나와 유우를 찾아 군대를 이끌고 맞이하러 나오도록 명령했다. 유화는 원술의 영지를 지나게 되었으며, 원술에게 천자의 생각을 설명했다. 원술은 유우를 이용하여 견제하고 있었으므로 유화를 붙잡아 두고 출발시키지 않았으며, 유우의 군대가 도착한 후에 그와 함께 서쪽으로 갈 것을 승낙하고 유화로 하여금 유우에게 편지를 쓰도록 했다. 유우는 유화의 편지를 받고 수천 명의 기병을 그에게 보내 주었다. 공손찬은 원술이 두 마음을 갖고 있음을 알고 군대를 파견하지 않으려고 했으며, 유우가 군대를 일으키는 것을 제지하려 했으나 유우는 듣지 않았다. 공손찬은 이 점을 원술이 듣고서 원망할까 두려워하여 그의 사촌동생 공손월(公孫越)에게 기병 수천 명을 인솔하여 원술에게 가서 손을 잡게 하고, 비밀리에 원술을 시켜 유화를 잡아 그가 갖고 있던 군사 지휘권을 빼앗도록 했다. 이로부터 유우와 공손찬은 더욱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유화는 원술에게서 도망나와 북쪽을 향해 달렸으나, 또 다시 원소에게 잡혀 머물게 되었다.

이 때, 원술은 손견을 보내 양성에 주둔시켜 동탁에 대항하도록 하였고, 원소는 주앙(周昻)을 보내 그곳을 탈취하도록 하였다. 원술은 공손월과 손견을 보내 주앙을 공격하도록 했으나 승리하지 못했고, 공손월은 날아오는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으니, 공손찬은 격노하여 말했다.

"내 동생이 죽었으니, 이 재난은 원소로부터 시작되었다."

군대를 내보내 반하(磐河)에 주둔시키고 원소에게 복수할 준비를 했다. 원소는 두려웠으므로, 자기가 차고 있던 발해태수의 인수를 공손찬의 사촌 공손범(公孫范)에게 주고, 그를 발해군으로 보내어 공손찬과 우호관계를 맺으려 했다. 공손범은 발해 군대를 이끌고 공손찬을 도와 청주와 서주의 황건을 격파시키니, 군대는 더욱 강성해졌고 계교(界橋)까지 진군하였다. 그는 엄강(嚴綱)에게 기주를 다스리게 하고, 전해(田楷)에게 청주를 다스리게 했으며, 단경(單經)에게 연주를 다스리도록 하여 군이나 현의 장관을 임명했다. 원소는 광천(廣川)에 진을 치고, 대장 국의(麴義)를 앞쪽에 배치하여 공손찬과 싸우게 하였고 엄강을 사로잡았다. 공손찬은 발해에게 달아나 공손범(公孫範)과 함께 괵주로 돌아와 큰 성 동남쪽에 작은 성을 만들었는데, 유우가 있는 곳과 접근해 있었으므로 점차 서로 원한을 품고 바라보게 되었다.

유우는 공손찬이 난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군대를 움직여 공손찬을 공격했다. 그러나 유우는 공손찬에게 패하여 거용(居庸)으로 도주하였다. 공손찬은 거용을 공격하여 유우를 사로잡았으며, 그를 포로로 하여 괵주로 돌아왔다. 이 때 동탁이 죽었으며, 천자는 사자 단훈(段訓)을 보내어 유우의 식읍을 증가시키고 육주(六州)를 감독하도록 했고, 공손찬은 전장군으로 승진하고 역후(易侯)로 봉해졌다. 공손찬은 유우가 황제를 칭하려 했다고 무고하고, 단훈을 협박하여 유우를 참형에 처했다. 공손찬은 단훈을 추천하여 유주사자로 임명시켰다. 공손찬은 교만하고 방자하여 다른 사람의 잘못은 기억하지만, 장점은 잊어버려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살해되었다. 유우의 종사 어양(漁陽) 사람 선우보(鮮于輔)와 제주(齊周) 기도위 선우은(鮮于銀) 등은 유주의 병사들을 이끌고 공손찬에게 복수하려고 하였는데, 연(燕)나라 사람 염유(閻柔)는 줄곧 은혜를 베풀고 신뢰를 쌓았으므로 모두들 염유를 오환족의 사마로 추대하였다. 염유는 오환족과 선비족을 끌어들이고, 이민족과 한나라 사람 총 수만 명의 군사를 얻어 공손찬이 배치시킨 어양태수 추단(鄒丹)과 노북(潞北)에서 접전을 벌여 그를 무찌르고 아울러 죽였다. 원소는 또 국의와 유우의 아들 유화에게 군사들을 지휘하게 하여 선우보와 합류시켜 공손찬을 공격하도록 했다. 공손찬은 몇 차례 싸움에서 지더니 역경(易經)으로 도망가 수비만 공고히 했다. 그는 열 겹의 참호를 파고, 참호 뒤로는 아주 높은 흙산을 쌓았는데, 높이는 대여섯 장이나 되며, 그 위에 누각을 만들었다. 참호 안 중심에 쌓은 흙산은 그 높이가 십 장(丈)에 이르며, 그 자신은 그 위에 머물렀고 그곳에 3백만 석의 곡물을 쌓아 놓고 있었다. 공손찬이 말했다.

"과거에 나는 천하의 일은 손가락으로 휘둘러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보니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없소. 병사들을 쉬게 하고 농사에 온 힘을 기울여 양식을 축적하는 것이 더 낫소. 병법에 백 겹의 누대는 공격할 수 없다고 하였소. 지금 나의 누대는 천 겹이고, 이곳 양식을 다먹으면 천하의 정세는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오."

그는 이런 방법에 의지하여 원소가 지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생각을 했다. 원소는 대장을 보내 공격했지만 , 몇 년이 되도록 함락시킬 수 없었다.

건안 4년(199)에 원소는 전군을 출동시켜 공손찬을 포위했다. 공손찬은 아들을 흑산적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하도록 하고, 자기는 집적 돌격 기병대를 이끌고 단숨에 포위망을 뚫고 나와 서남쪽의 산악지대를 따라 흑산의 병력을 거두어 기주를 공격하여 원소의 후원을 단절시키려고 생각했다. 장사 관정(關靖)이 공손찬을 설득하여 말했다.

"지금 장군의 장수와 병사들은 땅이 꺼지듯 완전히 와해되었습니다. 그들이 서로 유지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은 집에 있는 부모와 자식을 걱정하고 장군을 주인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장군이 장기간 지키고 있는다면, 원소는 장차 자발적으로 군대를 물릴 것입니다. 워소가 자진하여 군대를 물리고 나면, 사방의 무리들은 또 모일 것입니다. 만일 장군이 지금 이곳을 버리고 떠난다면, 군대는 지켜야만 되는 중요한 곳이 없어지게 될 것이고, 역경은 순간적으로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장군이 본거지를 잃고 황야로 고독하게 떠돌면 또 무슨 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공손찬은 출동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구원병이 도착한 후, 공손찬은 안팎에서 원소를 공격하려고 사람을 시켜 아들에게 펴니를 보내 날을 정하고, 군대가 도착하면 횃불을 들어 알리도록 했다. 원소의 염탐꾼이 그 편지를 손에 넣어 약속한 날에 횃불을 들었다. 공손찬은 구원병이 도착하였다고 생각하고 병사를 내보내어 싸움을 시작했다. 원소는 복병을 숨겨 놓고 공격을 하였으므로, 공손찬은 크게 패배하고 돌아와 수비를 굳게 했다. 원소는 땅 밑으로 길을 파서 돌격하여 누각을 무너뜨리고, 공손찬이 살고 있는 중앙의 흙산 가까이까지 갔다. 공손찬은 자신이 졌음을 알고, 처자식을 전부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선우보가 그의 부하들을 데리고 천자의 명을 받들었으므로 천자는 그를 건충장군(建忠將軍)에 임명하고, 유주의 육군을 감독하도록 했다. 조조와 원소 등이 관도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염유가 사자를 조조에게 보내 투항을 신청했으므로, 그를 호오환교위(護烏丸校慰)로 승진시켰다. 또 선우보가 직접 조조를 만나러 왔으므로 좌도요장군(左度遼將軍)으로 임명하고 정후로 봉하여 원래의 주(유주)로 돌아가 진무하도록 했다. 조조가 원담이 있는 남피를 격파하자, 염유는 부하와 선비족을 이끌고 와서 명마를 바치고 대군을 영접하였으며, 삼군의 오환족 요서군의 답돈(踏頓), 요동군의 소복연(蘇僕延), 우북평군(右北平郡)의 오연(吳延) 을 정벌하는데 참가하였으므로 그를 관내후에 봉했다. 선우보는 또 그의 부하들을 인솔하여 조조를 따라가 싸웠다. 위문제는 황제 자리에 있을 때, 선우보를 호아장군(虎牙將軍)에 임명하고, 염유를 도요장군(度遼將軍)에 임명하였으며, 모두 현후(縣侯)로 승진시켜 봉하고 특진의 자리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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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삼국지 - 정사 "곽가전"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22:05

삼국지 Ⅸ의 곽가

삼국지 Ⅸ의 곽가



지략으로 보면 삼국지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곽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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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가전(郭嘉傳)

곽가는 자가 봉효이고, 영천군 양적현 사람이다.

처음에는 북방을 지나다가 원소를 만났는데, 원소의 모신으로 있었던 신평과 곽도에게 말했다.

"무릇 지혜가 있는 사람은 주군이 될 사람을 헤아려야만 백 번 군대를 일으켜 백 번 완벽하게 공명이 세워질 수 있는 것이오. 원공은 한갓 주공의 낮은 선비를 모방하려 하고, 인재를 등용하는 기틀을 알지 못하고 있소.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서단은 많으나 요령이 적고, 모략을 좋아하지만 결단력이 없어 그와 더불어 천하의 큰 난국을 구제하고 패도로서 왕업을 정하기는 어려울 것이오."

그리고는 마침내 원소를 떠났다. 이보다 앞선 시기에 영천의 희지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책략에 뛰어난 인물이므로 조조는 그를 매우 중용했지만, 일찍 죽었다.

조조는 순욱에게 글을 써서 말했다.

- 희지재가 죽은 이후로는 나와 더불어 일을 계획할 수 있는 사람이 없소. 여남과 영천에는 본래 뛰어난 인물이 많거늘, 누가 희지재를 계승할 수 있겠소?

순욱은 곽가를 추천하였다. 조조는 그를 불러 천하의 일을 논의하고, 곽가에게 말했다.

"나로 하여금 큰 일을 이룰 수 있게 할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이구나."

곽가는 밖으로 나가서 역시 기뻐하며 말했다.

"조공은 진정 나의 주공이구나!"

조조는 표를 올려 곽가를 사공군좨주로 삼았다.

조조가 여포를 정벌할 때 세 번 싸워 그를 격파하자, 여포는 퇴각하여 성을 굳게 지켰다. 그 당시 조조 군대의 사졸들은 지쳐있었으므로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잡아오려고 생각했는데, 곽가가 조조에게 급히 공격하라고 설득하여 마침내 여포를 사로잡을 수 있었다. 이 일은 <순유전>에 있다.

손책(손책)은 1천 리에 걸쳐 전선을 구축하고 강동의 주군을 거의 소유하였다.

그는 조조가 원소와 관도에서 대치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강을 건너 북방의 허도(허도)를 습격하고자 했다. 조조 진영의 모든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였는데, 곽가는 이 일을 헤아려 말했다.

"손책은 이제 막 강동을 병탄한 것이며, 그에 의해서 주살된 자들은 모두 영웅 호걸이며 주군을 위해 죽을 힘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손책은 경솔하고 대비도 없으니, 비록 백만의 군대가 있다고 해도 혼자 중원(중원)에 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만일 자객이 숨어 있다가 일어나면 단지 한 사람의 적일 뿐입니다. 제가 그를 보건대 반드시 필부의 손에 의해서 죽을 것입니다."

손책은 장강에 임하여 건너기도 전에 과연 허공(허공)이라는 자객에 의하여 죽음을 당했다.

후에 곽가는 조조를 따라 원소를 격파했다. 원소가 죽은 후에 또다시 대군을 따라 원담과 원상을 여양에서 크게 물리쳐 모두 승리했다. 여러 장수들은 승리한 여세를 몰아 그들을 크게 공격하려고 했으나, 곽가가 말했다.

"원소는 이 두 아들을 사랑했으나, 생전에 누구를 세워야 할 지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곽도와 봉기가 그의 모신이 되었지만, 반드시 원씨 형제들 사이에서 서로 다투다가 역시 서로 어그러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군대가 그들을 핍박하면, 그들 형제는 군대를 합쳐 우리와 서로 대치하게 될 것이고, 그들을 느슨하게 풀어주면 그들 형제는 다투려는 마음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남쪽으로 가서 유표를 정벌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그리고서 형세의 변화를 기다렸다가 변화가 생긴 후에 공격하면 한 번 출동으로 평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조조는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좋소"

그리고는 남쪽으로 정벌을 떠났다. 군대가 서평(서평)에 이르렀는데, 원담과 원상은 과연 기주를 차지하려고 다투고 있었다. 원담은 원상에게 패배하게 되자 달아나 평원(평원)을 지켰으며, 아울러 신비를 보내 조조에게 항복을 구했다.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 그를 구해주었으며, 마침내 업성을 공략하였고, 또 다시 남피에서 원담을 공격하자 기주는 평정되었다.㈜ 조조는 표를 올려 곽가를 유양정후(유양정후)로 봉하게 했다. 조조가 원상 및 삼군의 오환족을 정벌하려고 할 때, 부하들은 대부분 유표가 유비를 파견하여 허도를 습격함으로서 조조를 칠 것이라고 두려워하였는데, 곽가가 말했다.

"명공은 비록 천하에 위세가 진동하지만, 오랑캐들은 그가 먼 곳에 있는 것만 믿고 반드시 방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방비하지 않은 것을 틈타 갑자기 그들을 공격하면 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원소는 항상 북방 오랑캐의 민중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며, 원상 형제도 아직 생존해 있습니다.

지금 원씨가 다스리는 네 주의 백성들은 공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잠시 귀순하게 되며, 명공께서는 은덕을 더 이상 베푸시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 만일 원상을 남겨 놓고 남쪽으로 정벌하러 가시면 원상은 한족의 도움에 의지하여 다시 주인을 위해 죽음을 본받았던 신하들을 불러들이게 될 것이고, 오랑캐들이 다시 한 차례 충돌하면 한족들이 모두 호응하게 될 것이며, 이렇게 되면 오환의 선우 답돈은 또 다시 남쪽으로 중원을 넘보려는 야심을 품게 될 것이며, 제업(제업)의 야심을 이루게 되면, 아마도 청주와 기주도 우리의 소유가 아닐 것입니다. 유표는 단지 앉아서 이야기하는 세객(세객)일 뿐입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재략이 유비를 제어하는 데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유비에게 중임을 맡기면 제지할 수 없을 것이고, 유비를 하찮은 직책에 임용하면 유비는 쓸모가 없으니, 공께서 비록 나라를 비워두고 멀리 정벌하러 가더라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조조는 이 말을 듣고 드디어 떠났다. 대군이 역현(역현)에 이르자 곽가가 말했다.

"군대는 신속함을 귀하게 여깁니다. 지금 천 리나 행군하여 다른 사람을 습격하는데, 치중이 너무 많아 이로움을 얻기가 힘들며, 또한 적들이 공격소식을 듣고서 반드시 방비하게 될 것이니, 치중을 남겨두고 가볍게 무장한 병사들을 낮과 밤을 달려 충돌하게 되면 그들은 생각지도 못한 시기에 습격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조조는 곧 비밀리에 노용새(노용새)에까지 보내어 직접 선우 답돈의 용정(용정)에까지 이르게 했다. 파로(파로)의 병졸들은 조조의 대군이 갑자기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면서 맞붙어 싸웠다. 조조는 오환군(오환군)을 크게 이기고, 답돈의 머리를 베었으며, 각왕(각왕;큰 부족의 왕) 이하의 지도자를 모두 참수했다.

원상과 그의 형 원희는 요동으로 달아났다.

곽가는 깊은 통찰력이 있었고 모략(모략)을 세우는 데 뛰어났으며, 사리와 인정(人情)에 대해서는 통달했다. 조조가 말했다.

"오직 봉효(봉효;곽가의 자)만이 나의 뜻을 확실히 알 수 있소."

나이 서른여덟에 유성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질병이 심했다. 조조는 그의 질병에 관해 물어보고 여러 차례 문병을 갔다. 곽가가 죽었을 때, 조조는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매우 슬퍼하면서 순유 등에게 말했다.

"여러분들의 나이는 모두 나와 동년배지만, 오직 봉효만이 가장 젊소. 천하를 평정하는 일이 끝나, 그에게 뒷일을 부탁하려고 했는데, 중년의 나이에 요절하였으니, 이는 운명이요!"

곧 이어 천자에게 표를 올려 말했다.

- 군좨주(군좨주) 곽가는 정벌에 따라 나선지 11년이 되었습니다. 매번 중대한 논의가 있었으며 적을 만나면 변화에 대처하였습니다. 신의 책략이 결정되지도 않았을 때, 곽가는 문득 그것을 처리하였습니다. 천하를 평정하는데, 그의 모략과 공적은 높습니다.

불행하게도 명이 짧아 대업을 끝마치지 못했습니다. 곽가의 공을 거슬러 생각해 보면, 진실로 잊을 수 없습니다. 그에게 식읍을 8백호 증가시켜 주시어 이전의 것과 합쳐 1천 호가 되도록 해 주십시오."

시호를 정후(정후)라 하고, 아들 곽혁(곽혁)으로 하여금 뒤를 잇게 했다.

나중에 조조가 형주를 정벌하고 돌아올 때, 파구(파구)에서 역질을 만나 군함을 모두 태워 버리고 탄식하며 말했다.

"곽봉효가 살아 있었더라면, 나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전에 진군(진군)은 곽가의 품행이 수양되어 있지도 않고 검소하지도 않다고 하면서 비난하였고, 몇 차례에 걸쳐 조정에 곽가를 기소했지만, 곽가의 의지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으므로 조조는 곽가를 더욱더 중시했다. 그러나 조조는 진군이 정도(정도)를 견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역시 그에게도 호감을 갖고 있었다.

곽혁이 태자의 문학(문학)이 되었지만,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아들 곽심(곽심)이 뒤를 이었다. 곽심이 죽자, 아들 곽창(곽창)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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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삼국지 - 정사 "이엄전"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21:57

삼국지 Ⅸ의 이엄(이평)

삼국지 Ⅸ의 이엄(이평)



촉의 이엄(이평)에 대한 글입니다. 상당히 좋은 평을 받은 인물이었으나 한번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거짓 보고)로 쓸쓸히 초야에서 생을 마감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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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엄은 자가 정방이고, 남양군 사람이다. 젊었을 때 군의 관리가 되었고, 잭산으로 인하여 칭찬받았다. 형주목 유표는 그를 차견하여 여러 군현의 장을 역임하도록 했다. 조조가 형주로 진입했을 때, 이엄은 자귀현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서쪽의 촉나라로 달아났다. 유장은 그를 성도의 현령으로 임명했고, 그는 또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건안 18년(213)에 이엄을 호군으로 임명하여 면죽에서 유비를 막아내도록 했다. 그런 이엄은 병사들을 이끌고 유비에게 투항했다. 유비는 이엄을 비장군으로 임명했다. 성도가 평정된 후, 건위태수, 흥업장군으로 임명 되었다.

23년(218)에 도적 마진, 고승등이 처에서 모반하여 수만 명을 모아 자중현으로 진격했다. 그 당시 유비는 한중에 있었고, 이엄은 다시 병사를 징발할 수 없었다. 단지 그 군의 병사 5천 명을 이끌고 토벌하러 가서 마진과 고승등의 머리를 베었을 뿐이다.

잔여세력들은 뿔뿔이 흩어져 전부 민적으로 회복되었다. 또 월수 만족의 우두머리 고정이 군대를 파견하여 신도현을 포위하자, 이엄은 기병을 이끌고 달려가 구원하여 적은 모두 달아났다. 보한장군의 관직을 더했으며, 건중군을 관리하는 것은 이전과 같았다.

장무 2년(222)에 유비는 이엄을 불러 영안궁까지 오도록 하여 상서령으로 임명했다. 3년(223)에 유비의 질병이 악화되자, 이엄은 제갈양과 함께 어린 유선을 보좌하라는 유조를 받았다. 이엄을 중도호로 임명하고 안팎의 군사를 통솔하며 영안에 주둔하도록 했다.

건흥 원년(223)에 도향후로 봉하고 가절로 삼고 광록훈을 더했다. 4년(226)에 전장군으로 전임됐다. 제갈양은 한중으로 출병하려고 하면서 이엄이 반드쉬 뒷일을 맡아 줄것으로 생각하고 강주로 옮겨 주둔시키고, 호군 진도를 남겨 영안에 주둔시켜 모두 이엄의 통솔하에 두었다. 이엄은 맹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말했다.

저는 제갈공명과 함께 유비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책임이 막중한 것이 걱정입니다. 좋은 동반자를 얻고 싶습니다.

제갈양 역시 맹달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일을 처리하는 것이 마치 물흐르듯하여, 해야할 일과 버려야 할일을 결정할때 주저함이 없는 것이 정방의 성격입니다.

이엄이 귀하게 존중받는 것은 이와 같았다.

8년(230)에 표기장군으로 승진했다. 조진이 세 갈래 길로 나누어 한천으로 진격해 왔으므로, 제갈양은 이엄에게 2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한중에 가도록 명령했다.

제갈양은 표를 올려 이엄의 아들 이풍을 강주도독독군으로 임명하고, 이엄의 후방 일을 담당하도록 했다. 제갈양은 다음해 출병을 확정짓고 이엄에게 중도호의 신분으로 승상부의 일을 맡도록 명령했다. 이엄은 이평으로 개명했다.(이엄=이평)

9년(231) 봄에 제갈양의 군대는 기산에 주둔하였고, 이평이 수송 업무를 재촉하며 감독했다.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계속 장마비가 쏟아져 식량 운반이 지속되지 못했으므로, 이평은 참군 호충과 독군 성번을 파견하여 그의 뜻을 설명하고 제갈양에게 후퇴하여 돌아오도록 하라고 했다. 이평은 군대가 후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거짓으로 날란체 하며 말했다.

"군량미는 아직 충분하거늘, 어찌하여 돌아옵니까?"

이평은 이렇게 하여 자기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책임을 벗어나고 제갈양이 진군하지 않은 잘못을 분명하게 나타내려고 했다. 또 유선에게 표를 올려 말했다.

우리 군대가 거짓으로 퇴각한 것은 적을 유인하여 함께 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갈양이 이평이 앞뒤로 쓴 편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공개했으므로, 이평의 잘못은 분명해지게 되었다. 이평은 힘껏 변명하고 죄를 자백하고 사죄했다. 그래서 제갈양은 이평의 일을 상주하여 말했다.

선제께서 붕어하신 이후부터 이평은 임지에서 기산을 다스리며 작은 은혜를 베푸는 일을 하기를 원했고, 자신을 지키고 명예를 추구하며 나라의 일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북방으로 출병을 하면서 이평의 병사들에게 한중을 지키도록 하려고 했습니다. 이평은 이일을 직접 하기에는 어려우며, 올 의사가 없었으므로 다섯 개 군을 주어 파주자사로 임명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작년에 신이 서쪽으로 정발나가려고 하면서 이평으로 하여금 한중을 관리하도록 했는데, 이평은 사마의 등이 관서를 설치하여 자신을 초청했다고 말했습니다. 신은 이평의 계산으로 출병한 기회를 틈타 신을 핍박하여 자신에게 이익을 얻도록 하려고 했음을 알았습니다. 이 때문에 표를 올려 이평의 아들 이풍에게 강주를 관리하도록 하고 융성한 대우를 해줌으로써 한 시기의 정무를 처리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평이 한중에 있을 대, 모든일을 그가 책임지도록 했으므로 신하들은 지위의 높고 낮음을 불문하고 모두들 신이 이평을 너무 후하게 대우한다며 질책했습니다. 그대는 국가의 대사가 아직 확정되자 못했으며 한나라 왕실이 기울어 위험하였으므로, 이평의 잘못을 문책하는 것은 그를 칭찬하는 것만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평의 마음은 영예와 이익에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지, 이평의 마음이 시비를 전도시키는 데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만일 일의 처리를 늦추게 된다면 재화와 실채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신이 민첩하지 못한 결과이며, 설며을 많이 할수록 허물은 늘어 날 것입니다.

곧바로 이평의 관직을 폐하여 서민이 되게 했으며, 재동군으로 방축시켰다.

건흥 12년(234)에 이평은 제갈양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질병이 들어 죽었다. 이평은 항상 제갈양이 자신을 다시 살려줄 것으로 기대했으며, 제갈양의 후계자는 이런 기회를 주지 않을 것임을 헤아렸기 때문에 격분하여 결국 병들어 죽은 것이다. 이풍의 관직은 주제태수에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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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삼국지 - 정사 "위연전"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21:53

삼국지 Ⅸ의 위연

삼국지 Ⅸ의 위연



삼국지 연의에서는 위연을 끝에 촉을 배반한 惡人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정사의 위연전은 이와 다르게 위연을 다른 시각에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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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연전(魏延傳)

위연은 자가 문장(文長)이고, 의양군(義陽郡) 사람이다. 그는 부속(部屬)의 신분으로 유비를 수행하고 촉으로 들어가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으므로 아문장군으로 승진했다.

유비는 한중왕이 되었을 때, 성도로 옮겼으므로 한천(漢川)을 지킬 중요한 장수를 얻어야 했다. 사람들의 의론은 틀림없이 장비가 임용될 것이라는 데 있었고, 장비 또한 마음속으로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유비가 뜻밖에 위연을 발탁하여 한중왕 진원장군(鎭遠將軍)으로 임명하고 한중태수를 겸임하도록 하자 군사들은 전부 놀랐다.

유비는 신하들을 모아 놓고 위연에게 질문했다.

"지금 그대에게 중임을 맡겼는데, 그대는 직무를 어떻게 담당할 것인지 말해 보시오."

위연이 대답했다.

"만일 조조가 천하를 들어온다면, 대왕을 위해 그를 막기를 원합니다. 부장이 인솔하는 10만 병사를 이르게 한다면 대왕을 위해 그들을 소멸시키기를 원합니다."

유비는 그를 매우 칭찬하고, 사람들은 모두 그의 장엄한 말에 감복했다. 유비가 제호를 칭한 후, 위연을 진북장군으로 승진했다.

건흥 원년(223)에는 위연을 서쪽의 강중(羌中)으로 진입하도록 했다. 위나라의 후장군 비요(費搖)와 옹주자사 곽회(郭淮)는 위연과 양계(陽谿)에서 싸웠는데, 위연은 곽회 등을 크게 격파시켜 전군사정서대장군 가절로 승진했으며 남정후(南鄭侯)에 봉해졌다.

위연은 항상 제갈양을 수행하여 출정하였다. 병사 1만 명을 요청하여 제갈양과는 다른길로 진출하여 동관(潼關)에서 만나 한신의 선례에 따르려고 했지만, 제갈양이 제지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위연은 항상 제갈양을 겁장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음을 한탄했다.

주석) 하후무(夏侯楙)가 안서장군으로 임명되어 장안 수비를 맡았다. 제갈양이 남정(南鄭)에서 부하들과 전략을 논의할 때, 위연은 이렇게 말했다. "듣건대 하후무는 젊고, 조조의 사위이며 겁장이이고 지모가 없다고 합니다. 지금 저에게 정예 5천명과 휴대할 식량 5천 석을 주신다면, 곧장 포중(褒中)을 뚫고 나가 진령산(秦嶺山)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자오곡(子午谷)에 당동하여 북쪽으로 간다면 열흘이 지나지 않아 장안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하후무는 저 위연이 갑자기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틀림없이 배를 타고 도주할 것입니다. 장안성 안에는 단지 어사와 경조태수만이 있을 뿐이므로, 횡문(橫門)에 있는 식량 저장 창고와 흩어지는 백성들의 곡물로 군사의 식량은 충분할 것입니다. 동쪽(위)이 병력을 모으는 데는 20일은 걸릴 것이므로 공이 사곡(斜谷)을 뚫고 나오면 반드시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한 번의 행동으로 함양(咸陽) 서쪽 지역을 평정할 수 있습니다."

제갈양은 이것을 위험한 계책이라고 판단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위연은 사졸을 잘 양성하였고 사람들을 뛰어넘는 용맹성이 있었으며, 또 성격이 오만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를 피했다. 오직 양의(楊儀)만은 위연에게 조금도양보하지 않았으므로, 위연은 매우 분개했는데, 마치 불과 물 같았다.

건흥 12년(234)에 제갈양이 북곡구(北谷口)로 출병하자, 위연이 선봉이 되었다. 제갈양의 진영으로부터 10리 떨어진 곳까지 나간 위연은 머리에 뿔이 나는 꿈을 꾸었다.

꿈 해몽가인 조직(趙直)에게 묻자, 조직은 위연을 속이며 말했다.

"기린은 뿔이 있지만 쓰지 않습니다. 이것은 싸우지 않고 적군이 자멸하려는 징조입니다."

조직은 물러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각(角)이라는 글자는 칼(刀)아래에 쓰였습니다. 머리 위에 칼을 쓰고 있으므로 매우 불길합니다.

가을, 제갈양이 질병의 악화로 위험한 지경에 이르자, 비밀리에 장사 양의, 사마 비의, 호군 강유 등과 자신이 죽은 후에 군사를 철수시키는 일에 관한 지도를 주었다. 위연에게는 적의 추격을 차단시키도록 하고, 강유에게는 그 앞에 위치하도록 했다. 만일 위연이 혹시라도 명령을 따리지 않을 경우에는 군대를 그대로 출발시키도록 했다. 제갈양이 세상을 떠난 후, 이 사실을 비밀로 하고 상을 발표하지 않았다. 양의는 비의에게 명하여 위연이 있는 곳으로 가서 태도를 살피도록 했다. 위연이 말했다.

"승상은 비록 죽었지만, 나는 건재합니다. 승상부에서 신임을 받은 관리들은 시신을 운반해 귀국하여 장례를 치러야 합니다. 나는 직접 병사들을 인솔하여 적을 공격할 것입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죽었다고 하여 천하의 일을 내팽개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나 위연이 어떤 사람인데, 양의의 지휘를 받아 후방을 끊는 장수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비의와 함께 떠날 부대와 남을 부대를 구분하고, 비의에게 편지를 써서 자기와 이름을 나란히 하여 장수들에게 알리도록 했다. 비의는 위연을 속여 말했다.

"저는 그대를 위해 돌아가 양장사(楊長史)를 이해시킬 것입니다. 장사는 문관으로 군사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지 못하므로 틀림없이 그대의 명령을 어기지 않을 것입니다."

비의가 문을 나와 말을 달려 떠난 후에야 위연은 비의를 보낸 것을 후회하고 추격했지만 잡을 수 없었다. 위연은 사람을 보내 양의 등을 살피도록 하여, 제갈양의 지도에 따라 군영들은 순서대로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위연은 대단히 분노하여 양의가 출발하기 전에 인솔하던 자신의 부하들을 먼저 남쪽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지나친 길은 불을 질러 다리를 끊어 놓았다.위연과 양의는 각자 서로 반역을 했다는 내용의 표를 올렸으며, 하루 사이에 긴급함을 알리는 문서가 조정으로 전해졌다. 유선은 시중 동윤과 유부장사(留府長史) 장완에게 이 일을 물었다. 장완과 동윤은 모두 양의를 보증하고 위연을 의심했다. 양의등은 산의 나무를 잘라 길을 여는 것을 밤낮으로 겸하여 역시 위연 군대의 뒤를 바짝 이었다. 위연은 먼저 도착하여 남곡구를 차지하고 병사들을 보내 양의 등을 역으로 공격했다. 양의 등은 하평(何平)에게앞에서 위연을 막도록 했다. 하평이 위연의 선봉부대에게 질책하여 말했다.

"제갈공명이 죽어 그 시신은 아직 식지도 않았거늘, 너희들은 어찌하여 감히 이런 행동을 하느냐!"

위연의 병사들은 잘못이 위연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명령에 따르는 자가 없었고 군대는 모두 흩어졌다. 위연은 혼자 아들 몇 명과 함께 도망쳐 한중으로 달아났다. 양의는 마대(馬岱)를 보내 추격하여 그의 머리를 베도록 했다. 위연의 머리가 양의에게 전해지자, 양의는 일어나 직접 그 머리를 밟고 말했다.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재능꾼아! 또 다시 나쁜 일을 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위연의 삼족을 멸했다. 당초 장완은 숙위(宿衛) 제군을 이끌고 위험을 피해 북쪽으로 갔는데, 몇 십 리 가서 위연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고 돌아왔다. 위연의 마음을 추측해 볼 때, 북쪽으로 가서 위나라에 항복하지 않고 남쪽으로 돌아온 것은 단지 양의 등을 제거하여 죽이려고 한것이다. 평상시 여러 장수들과 항상 의견이 달랐고, 그 당시 여론이 틀림없이 자신이 제갈양을 대신해야 한다고 하기를 바랐을 뿐 위연의 본래 뜻은 촉나라를 배반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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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삼국지 - 정사 "주유전"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21:33

삼국지 Ⅸ의 주유

삼국지 Ⅸ의 주유



김원중의 정사 삼국지에 있는 '주유전'입니다. 관심있으신 분들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앞서 말씀드리지만 연의와는 내용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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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전

주유는 자가 공근이며 여강군 서현사람이다. 당조부 주경과 주경의 아들 주충은 모두 한나라 태위를 지냈다. 부친 주이는 낙양현의 령을 지냈다.

주유는 건강하고 자태와 용모가 뛰어났다. 처음에 손견이 의병을 일으켜 동탁을 토벌할 때, 그는 집을 서현으로 옮겼다. 손견의 아들 손책은 주유와 나이가 같았으며, 두 사람의 우정은 남달랐다. 주유는 길 남쪽의 큰 저택을 손책에게 주고 방으로 들어가 그의 모친에게 배례했으며, 서로 있는것과 없는 것을 융통하며 돕고 살았다. 주유의 당부 주상이 단양태수로 있었는데 주유는 그를 찾아가 안부를 물었다. 마침 손책이 역양까지 있었으므로 급히 편지를 써서 주유에게 알렸다. 주유는 병사를 인솔하여 손책을 맞이했다. 손책은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나는 그대를 얻었으니, 전쟁은 순조롭게 될 것이오."

주유는 그래서 손책을 따라 횡강과 당리를 공격하여 모두 함락시켰다. 그리고 또 강을 건너 말릉을 공격하고, 작융과 설례를 격파시켰으며, 방향을 돌려 호숙과 강승을 공격하고 곡아로 진입하자 유요는 달아났으며, 손책의 병사는 이미 수만 명이 되었다. 그래서 손책은 주유에게 말했다.

"나는 이 병력이면 오국과 회계군을 취하고 산월을 평정하기에 충분하오. 그대는 돌아가서 단양을 지키시오."

주유는 돌아왔다. 오래지 않아, 원술이 주상을 대신할 태수로 사촌 동생 원윤을 보냈으므로 주유는 주상과 함께 수춘으로 돌아왔다. 원술은 주유를 부장으로 임용하려고 했지만, 주유는 원술에게는 끝내 성취할 것이 없음을 보았기 때문에 거소현의 장이 되기를 구하여서 길을 빌려 강동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며, 원술은 이에 동의했다. 그래서 주유는 거소에서 오로 돌아왔다. 이 해가 건안 3년(198)이다. 손책은 직접 주유를 영접하고, 건위중?"아장을 수여하고 즉시 병사 2천명과 기마 50필을 주었다. 주유는 당시 24세였고, 오군 사람들은 모두 그를 주랑이라고 불렀다. 주유의 은덕과 신의는 여강에서 빛났다. 손책은 그를 지방으로 내보내 우저를 지키도록 하고, 후에 춘곡현의 장을 겸임하도록 했다. 오래지 않아, 손책이 형주를 취하려고 할때, 주유를 중호군으로 임명하고 강하태수를 겸임하도록 했다. 주유는 손책을 따라 환현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당시 교공의 두 딸을 포로로 잡았는데, 모두 절색이었다. 손책 자신은 대교를 아내로 맞이했고, 주유는 소교를 아내로 맞이했다. 또 주유는 심양으로 진격하여 유훈을 격파시켰으며, 강하를 토벌하고 예장과 여릉으로 돌아와 평정하고 파구에 남아서 지켰다.

5년(200)에 손책이 죽자, 손권이 일을 통솔했다. 주유는 병사를 이끌고 조상하러 갔다가 오에 머물러 중호군으로써 장사 장소와 함께 모든 일을 관장했다.

11년(206), 그는 손유 등을 인솔하여 마둔과 보둔 두 주둔지를 토벌하고, 그곳의 우두머리의 목을 베어 나무에 매달았으며, 1만여 명을 생포해 군사를 돌려 궁정을 지켰다. 강하태수 황조가 부장 등룡을 보내 병사 수천명을 이끌고 시상으로 진입하도록 했다. 주유는 추격하여 토벌했으며, 등룡을 생포해 오군으로 보냈다.

13년(209) 봄, 손권이 강하를 토벌하고, 주유를 전부대독으로 임명했다.

이 해 9월, 조조가 형주를 침공하자, 유종은 수하의 사람들을 들어 투항했다. 조조는 그의 수군을 얻게 되었으며, 그 결과 수병과 보병은 수십 만 명이나 되었다. 오의 장수들은 이 소식을 듣고 모두 두려워 했다. 손권은 신하들을 불러 모아서 계책을 물었다. 논의하는 자들은 모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조는 승냥이와 호랑이처럼 사악하고 무섭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나라 승상의 명의에 기대어 천자를 끼고 사방을 정벌하고 움직이면서 조정의 뜻이라고 하는데, 오늘 그에게 저항한다면 일은 더욱 순조롭지 못할 것입니다. 게다가 장군에게 있어서 유리한 형세로 조조를 대항할 수있습니다. 유표는 수군을 훈련시켰고 몽충이나 투함이 수천 대 인데, 조조가 이것을 모두 포획하여 장강가에 늘어놓고 아울러 보병도 움직여 수군과 육군이 함께 내려온다면, 이때는 장강이 위험하게 되고, 이미 우리와 공동으로 차지하게 될것입니다. 그러나 쌍방의 세력은 현저하게 차이가 나므로 또 논할 수없습니다. 가장 좋은것은 그를 맞아들이는 것이라고 저희들은 생각합니다."

주유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조조는 비록 한나라 승상의 명의에 의탁하고 있지만, 사실은 한나라 조정의 적입니다. 장군은 신명스런 무위와 웅대한 재략을 갖고 있고, 겸하여 아버지와 형의 위세이 기대어 강동을 할거하고 수천 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병사는 정예이고 식량은 풍족하며 영웅들은 공업을 이루기를 원하고 있으므로, 오히려 웅당 천하를 횡행하며 한왕조를 위해 잔폭하고 더러운 것을 제거할 때입니다. 게다가 조조는 직접 사지로 보내져왔는데, 영접할 수 있겠습니까? 장군을 위해 헤아려보기를 요청합니다. 지금 북방의 영토를 이미 안정시켰고 조조에게 내부의 근심이 없어 시일을 늘려 오랫동안 전쟁터로 와서 싸울 수 있다고 하더라도 또 우리와 수면 위에서 싸워 이길 수 있습니까? 지금 북쪽 땅은 아직 평안하지 못하고, 게다가 마초와한수가 오히려 동관 서쪽에 있으면서 조조의 후환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병을 버리고 수군에 기대어 오나 월과 다투는 것은 본래중원에서는 잘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또 현재는 날씨가 추워 말에게 먹일꼴이 없고, 중원의 병사들에게 멀리 강호의 땅을 건너도록 하였으므로 물과 땅에 익숙지 못하여 반드시 질병이 생길 것입니다. 이러한 네 가지는 용병의 근심거리입니다.그러나 조조는 함부러 행동했습니다. 장군께서 조조를 잡으려고 한다면, 오늘이 마땅합니다. 저는 정예병사 3만 명을 받아서 하구로 나아가 주둔하기를 원합니다. 장군을 위해 조조를 무찌를 것을확신합니다."

손권이 말했다.

"사악한 적이 한왕실을 페하고 스스로 황제로 일어서러고 한 것은 오래되었소. 단지 원씨 두명, 여포, 유표와 남나을 꺼러했을 뿐이요. 지금 몇몇 영웅은 이미 소멸되었고, 오직 나만 여전히 남아있소. 나는 사악한 적과 양립할 수 없는 형세요. 그대가 당연히 공격해야 한다고 한 것은 나의 생각과 매우 부합하는 것이며, 이는 하늘이 그대를 나에게 준 것이오."

이때 유비는 조조에게 격파되어 병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강을 건너려고 생각하였는데, 당양에서 노숙과 만나 함께 상의하고 계획하여 나아가 하구에 주둔하고는 제갈양을 파견하여 손권을 알현하도록 했다. 손궈은 곧 주유와 정보 등을 파견하여 유비와 힘을 합쳐 조조에게 대항하도록 했다. 두군대는 적벽에서 만났다. 당시 조조의 병사들은 이미 질병에 걸려 있었으므로, 처음 한 차례 싸움에서 조조의 군대는 패하여 장강 북쪽에 주둔했다. 주유 등은 남쪽 해안가에 있었다. 주유의 부장 황개가 말했다.

"지금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기 때문에 오랜 시간 싸우는 것은 곤란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조조 군대의 배는 앞뒤가 서로 이어져 있으므로 불을 질러 달아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유는 몽충과 투함 수십 척을 취해 풀을 가득 싣고 그 가운데에 기름을 부어 휘장을 씌우고, 위에 아기를 세웠다. 그리고 먼저 편지를 써서조조에게 거짓으로 항복한다고 알렸다. 또 날랜 배를 미리 준비하여 각각 큰 배의 뒤에 매고 순서대로함께 전진했다. 조조 군대의 관리와 병사들은 모두 목을 빼고 바라보며 황개가 투항한다고 말했다. 황개는 여러 배를 풀어 동시에 불을 질렀다. 당시는 바람이 매우 사나웠으므로 해안 위의 진에까지 불길이 번졌다. 순식간에 연기와 불꽃이 하늘 가득 퍼졌고, 불에 타죽거나 익사한 병사와 말의 수는 헤아릴수 없었다. 조조의 군대는 결국 패하여군사를 돌려 남군을 지켰다. 유비는 주유 등과 함께 또 힘을 합쳐 추격했다. 조조는 조인 등을 남겨 강릉성을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곧장 북쪽으로 돌아갔다.

주유와 정보는 또 남군으로 전진하여 조인과 서로 대치하였는데, 각군은 대강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병사들이 아직 싸움을 하기도 전에 주유는 감녕을 보내 공격하며 포위해 들어갔다. 감녕은 주유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주유는 여몽의 계획을 사용하여 능통을 남겨 그 뒤를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여몽과 함께 감녕을 구하러 갔다. 감녕의 포위가 풀린 후, 주유는 강을 건너 북쪽 해안에 주둔하고 조인과 대전할 날을 정했다. 주유는 직접 말을 타고 싸움을 지휘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오른쪽 겨드랑이를 맞아 상처가 대단히 심했으므로 곧 바로 돌아왔다. 후에 조인은 주유가 일어나지 못하고누워있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를 이끌고 진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주유는 직접 일어나서 군영을 시찰하고 관리와 병사들을 격려했다. 조인은 이 때문에 후퇴했다.

손권은 주유를 편장군으로 제수하고, 남군태수를 겸임하도록 했다. 하준·한창·유양·주릉을 그의 봉읍으로 삼게 하고, 강릉에 주둔하여 지키도록 했다. 유비는 좌장군의 신분으로 형주목을 겸임하고 공안에 주둔했다. 유비가 경까지 와서 손권을 알현했을 때, 주유가 상소를 올려 말했다.

유비는 용맹하여 영웅다운 자태를 갖고 있으며, 관우와 장비처럼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를 끼고 있으므로 틀림없이 오랫동안 몸을 굽혀 다른 사람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유비를 오군으로 옮겨 놓고 그를 위해 궁전을 성대하게 짓고 미녀와 진귀한 완구를 많이 주어서 그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 관우와 장비 이 두 사람을 나누어 각기 한쪽에 배치하고 저같은 자로 하여금 그들을 지휘하여 싸우게 한다면, 대사는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토지를 나누어 주어서 그들이 기반을 세우는 것을 도와주고, 이 세 사람을 모아 함께 변방 땅에 있도록 한다면, 아마 교룡이 구름과 비를 얻어서 끝내 연못 속의 물건이 안되는 것과 같이 될 것입니다.

손권은 조조가 북방에 있기 때문에 응당 영웅들을 널리 촙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유비를 끝까지 제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주유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당시 유장은 익주목이 임명되었는데, 밖으로는 장로의 약탈과 침략이 있었다. 주유는 경으로 가서 손권을 알현하고 말했다.

"지금 조조는 방금 좌절과 고통을 당하여 마침 마음속으로 걱정하고 있으므로 아직은 장군과 병사를 이어서 서로 싸우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저는 분위장군과 함께 촉을 취하러 나가기를 원합니다. 촉을 얻고 장로를 병합한 후에 분위장군을 남겨 그 땅을 단단히 지키도록 한다면, 마초와 동맹관계를 맺을 것입니다. 저는 돌아와 장군과 함께 양양을 점거하여 조조를 추격한다면, 북방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손권은 주유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나 주유는 강릉으로 돌아와 행장준비를 하고 파구를 지날 때 병사했다. 당시 그는 36세였다. 손궈은 소복을 입고 애도하였는데, 주의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주유의 영구가 오나라로 돌아오자, 손권은 또 무호로 가서 맞이했으며, 모든 비용을 일체 공급했다. 후에 명령을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인이 된 장군 주유와 정보의 집안에 있는 손님들에게는 부세와요역을 묻지 말라.

당초 주유는 손책에게 좋은 친구로 대우받았고, 태비 또한 손권으로 하여금 형의 예로써 받들도록 했다. 이때 손권의 직위는 장군이었고, 그의 부장들과 빈객들의 그에 대한 예절은 오히려 간단했지만, 주유만은 유독 일찍부터 존경을 다하여 신하로써의 예절을 지켰다. 주유는 성격이 너그럽고 넓어서 대체로 인심을 얻었는데, 오직 정보와는 화해롭지 못했다.

주유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정통하였다. 비록 술을 많이 마신 후일지라도 연주한 음악에 틀린 부분이 있으면 주유는 반드시 그것을 알아냈고, 그것을 알아내면 반드시 돌아보았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가요에서 이렇게 말했다.

"곡에 잘못된 점이 있으면, 주랑이 돌아본다."

주유는 아들 둘에 딸 하나가 있었다. 딸의 배필은 태자 손등이었다. 아들 주순은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여 기도위로 제수되었고 주유의 풍모가 있었는데, 요절했다. 주순의 동생 주윤은 처음에 흥업도위로 임명되었고 종실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며, 병사 1천 명을 인솔하여 공안에 주둔했다. 황룡원년(229), 도향후로 봉해졌으며, 후에 죄를 범하여 여릉군으로 옮겼다.

적오 2년(239), 제갈근·보즐이 이름을 나란히 하여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인이 된 장군 주유의 아들 주윤은 지나친 칭찬을 받아 장군으로 봉해짐을 받았었습니다. 그는 특별히 두터운 대우를 받을 수 없을때는 공을 세우려고 생각하였으나, 도리어 방종하고 사용에 집착하여 매우 빨리 죄를지어 처벌을 초대하게 되었습니다. 신들의 사사로운 생각으로는, 주유는 과거 총애와 신임을 받았고, 안으로 들어오면 심복이 되었고, 밖으로 나가면 보좌하는 장수가 되었으며, 명을 받아 출정하면 죽음을 보고 돌아오는 것처럼 했습니다. 때문에 오림(적벽)에서 조조를 패배시키고, 영도(강릉)에서 조인을 도망치게하여 국가의 위험과 은덕을 떨쳐 전국이 진동하였으며 우매한 만형 중에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도록 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주의 방숙, 한의 한신인 영포일지라도 진실로 그를 뛰어 넘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대체로 적군을 꺾고 국가의 어려움을 막아낸 신하로서 옛날부터 제왕들에게 귀하게 여겨지고 중요시되지 않은자는 없었습니다. 때문에 한고조는 작위를 봉하는 서약서에서 말하기를, '설사 황하가 허리띠처럼 되고, 태산이 마모된 돌처럼 되더라도 그들의 봉국은 영원히 존재하도록 하여 후배 자손들에게 전하도록 한다'고 했습니다. 아울러 붉은 글로써 맹서 의식을 융숭히 하고, 종묘속에 넣어 두고 영원히 전해지게 했습니다. 이것은 공신의 후배들로 하여금 대대로 계승하여 자손뿐만 아니라 더욱 먼 후대까지도 관심을 기울려 신하의 공덕에 보답하고 표창하려는 것입니다. 간절하게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려고 하는 것은 후세의 사람들에게 권하고 경계하여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신하가 되어 죽어도 후회가 없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하물며 주유가 죽은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그의 아들 주윤을 강등시켜 평민이 되게 하였으니, 더욱더 슬픕니다. 저희들의 생각으로는, 폐하께서는 고대의 일을 고찰하여 정사를 영명하게 처리하며, 제후국을 일으키고 후계자를 세우는 것을 매우 중시하고 있으므로 주윤을 위해 청하니, 그의 죄를 사면시켜 주시고 병사들을 돌려주고 작위를 회복시켜 주어서 아침을 잘못알린 닭으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울 수 있도록 하고, 죄지은 신하도 이후에 효락을 펼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손권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심복이 되어 이전에공을 세우고 나의 함께 협력하여 일을 한 자 중에는 주공근이 있었는데, 확실히 잊지 못하오, 옛날 주윤이 나이가 어렸으며, 처음에는 공로가 없었는데도 정예 병사를 받아 지휘하고 왕후 장군의 작위로 봉해진 것은 주공근을 생각하여 주윤에게 미쳤던 것이오. 그런데 주윤은 이러한 것에 기대어 주색에 빠져 스스로 방자하였으며, 앞뒤로 몇 차례 말하여 깨우치게 하였지만, 일찍이 고친 일이 없었소. 나와 주공근과의 정의는 당신들 두 사람과의 것과 똑같은데, 주윤이 성취하는 것이 있기를 바라는 심정이 어찌 멈춰 있겠소? 주윤의 죄악을 구명하여 즉시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은 그로 하여금 고통을 받게 하여 스스로 알도록 하려는 것이오. 지금 당신들 두 사람이 한고조의 황하와 태산의 맹서를 간절히 인용하니, 나는 부끄럽소. 비록 나의 덕행은 한고조와 같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오. 주공근의 자식이고 두 사람이 중간에 있으니, 고치도록 할 수 있다면 또한 무슨 근심이 있겠소!"

제갈근과 보즐은 누차 표를 올렸고, 주연과 전종 또한 함께 진술하여 요청하였으므로 손권은 비로서 이를 허락했다. 이때 주유는 병으로 죽었다.

주유의 조카 주준 역시 주유의 탁월한 공로 때문에 편장군으로 임명되었고, 관리와 병사 1천 명을 인솔하게 되었다. 주준이 죽자, 전종은 표를 올려 주준의 아들 주호를 장수로 임명하려 했으나 손권이 말했다.

"이전에 조조를 달아나게 하고 형주를 개척한 것은 모두 주공근이 한일이니, 영원히 그를 잊지 않을 것이다. 처음 주준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때 주호를 임용하려고 했지만, 주호의 품성과 행실이 음험하다는 것을 들었다. 그를 관리로 임명하면 화란을 만들 것이기 때문에 이 생각을 멈추었다. 그러나 내가 주공근을생각하고 있는 것이 어찌 그침이 있겠는가?"


출처: 김원중 옮김의 정사삼국지.

p.s. 주유에게 잘못 한일이 있다면 그것은 공명과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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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삼국지 - 치세에 실패한 순욱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20:52

삼국지 Ⅸ의 순욱

삼국지 Ⅸ의 순욱



'치세에 실패한 순욱'이라는 제목에 의아하시는 분이 있으실 것 같군요. 개인적으로 순욱은 시대, 즉 상황에 맞지 않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온 비운의 인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그 생각에 기초하여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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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욱은 탁월한 전략가로 조조가 "그대는 나의 장자방이로다"라고 할 정도였다. 조조의 성공은 순욱의 공이 컸다. 그러나 순욱은 그 시대의 입장에서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왜나하면 순욱은 조조를 헌신적으로 도우면서도 조조의 가문이 위나라를 건국하는 것에는 반대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한나라 헌제(獻帝)를 앞세워 한나라의 부흥운동을 도모한 적도 없는 사람이다. 다만 순욱은, 조조가 '주공(周公)의 도'를 본받아 천하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여 그 권력을 다시 헌제에 돌려주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조조의 권력을 다시 한 나라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은 순욱 자신이 더 잘 알았을 것이다.

순욱의 실패는 노선의 불분명함에 있었다. 순욱이 한나라의 부흥을 도모하려 한다고 해도 당시에는 믿을 사람도 없었을 것이므로 순욱은 차라리 조조의 가문이 위나라를 여는데 매진하는 것이 오히려 그 자신의 입장에서는 나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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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삼국지 정욱과 인육 (人肉)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20:48

삼국지 Ⅸ의 정욱

삼국지 Ⅸ의 정욱


이 글을 읽기 앞서 말씀드리지만 이 글의 내용은 나관중의 삼국지 연의나 진수의 삼국지 정사에도 나오지 않는 내용입니다. 세어(世語)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이지요.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부담없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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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은 조조의 모신으로 많은 공적을 세운다. 특히 초반에 진궁과 장막의 모반으로 조조는 근거지인 연주를 잃을뻔 했지만 순욱과 더불어 정욱의 기지 덕분에 위기를 모면하였다.

여포와 조조가 다툴때 군량이 부족하여 원소의 계략에 넘어가 조조가 원소에게 가족을 인질로 하여 동맹을 체결하려고 하자 이를 만류시킨다. 또한 헌제를 옹립하는데에도 대부분의 장수들이 반대하는데 반해서 순욱과 함께 적극 정욱은 적극 찬성하여 결국 조조가 대의명분을 얻고 중원의 실력자로 급부상한다. 유비가 조조의 휘하에 있을때는 그의 영웅적인 기질을 알아보고 항상 경계하며 결국 죽일것을 여러차례 종용하기도 하였다. 후에 유비가 원술을 정벌하러갈때에는 유비가 배반할것을 눈치채고 곽가와 함께 반대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여러차례 냉철하고 정확한 조언과 적의 계략을 꿰둟는 안목으로 조조가 군웅할거때에 주도권을 잡는데 큰 기여를 한다. 하지만 이렇듯 수 많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공의 지위에 오를 수 없었다고 한다. 세설신어에서는 그 이유를 과거에 조조가 식량때문에 곤란을 겪자 약간에 식량을 조달했는데 거기에 인육을 섞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신임을 잃고 결국 공에 자리에까지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정욱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난 아니라고 본다. 물론 인육이라면 상당히 잔혹하고 상상할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입장과 기준에서 볼때의 평가일뿐이다. 실제로 중국은 고대로부터 동아시아, 나아가서는 세계 제일의 문명국을 자처하며 주변의 민족들을 오랑캐나 야만족속으로 치부하였다.

그러나 정작 중국은 오랫동안 식인문화가 있었던 실로 야만스러운 민족이다. 식인문화는 중국 4천년 역사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한나라가 건국된 기원전 206년부터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까지, 중국에서는 식인의 기록이 220차례나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다.

또 법률로 '살육의 형' 을 만들어 죄인을 죽여 그것을 음식으로 만들어 먹게 하는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성인 공자는 '해(인체를 잘게 썰어 누룩과 소금에 절인 고기)'를 즐겨서 해 없이는 식사를 안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공자가 아끼던 제자 자로가 위나라의 신하로 있다가 왕위다툼에 휘말려 살해되고, 그의 시체는 잘게 토막내어져 해로 만들어지고 말았다. 이 해는 사자에 의해 공자의 식탁에까지 전해졌다. 이 일 후로 공자는 그렇게 좋아하던 해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후에 인육이 약재로도 쓰여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인체 각 부위의 약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수당시대에는 인육시장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또 인육을 즐겨 먹는 사람은 열전이 만들어져 기록되기도 하였다.

중국의 식인 풍습은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등 유명한 중국 고대의 소설에도 잘 나타나 있다. <삼국지>의 경우, 정사로 기록된 진수의 삼국지에는 유비가 즐겨먹은 음식이 인육으로 만든 포였다고 하며, 여포가 죽은 후 그 고기를 죄인들에게 먹였다고 한다. 소설 <수호지>에서는 인육으로 고기만두를 만들어 파는 악한이 등장하고, <서유기>에서는 고승(高僧)의 고기가 불로장생의 영약이라 하여 삼장법사가 끊임없이 요괴들의 공격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이렇듯 중국은 수천년동안 인육을 식량의 하나로 여기고 먹어왔다. 정욱이 조조에게 군량에 제공한 인육은 식인문화를 가진 당시에는 그리 큰 문제가 없는것이다. 더구나 극심한 흉년과 잦은 전쟁, 이미 파괴된 농촌 시스템등에 의해서 더이상 중국내의 식량을 통한 자급자족은 한계에 다달았다. 따라서 인육을 식량 대용으로 먹는것은 그리 이상할 것이 아니다. 즉, 맛으로 먹는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 먹는것이다.

따라서 정욱이 인육을 제공했기 때문에 조정에서 신임을 잃었다는 것은 당시의 정서나 정황으로 볼때 납득하기가 힘들다. 아마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이유가 있는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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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사이비드래곤 2010.05.08 04:5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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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인육이 정욱의 자기 고향마을 사람들을 싹 다 도륙해다 바친 인육이라 -_-;

인망을 잃었죠 ( ...)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라고
From. Favicon of http://open2world.tistory.com 푸른빛 Open2World 2010.05.08 17:2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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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정사에 언급이 없는 내용이기 때문에 진위를 판단하기 어려운 내용이라지만... 인육이라...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죠.
From. 살짝 수정을 가하셔야 할 내용이 있는듯. 2011.02.16 19:4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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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정사에서 그런 내용은 나오지가 않습니다. 날조된 겁니다. 저 부분은 수정하셔야 할듯.. 저런 내용은 어떠한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거라..
From. Favicon of http://open2world.tistory.com 푸른빛 Open2World 2011.03.03 15:1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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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위에 정사에 나오지 않는 내용이라고 명시가 되있습니다만... 세어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From. 안북장군 2012.03.30 17:1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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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에 화웅은 관우에게 죽었으나......

정사에서는 그렇지가 않던데......

정욱 역시도 불분명한......
From. Favicon of http://open2world.tistory.com 푸른빛 Open2World 2012.04.02 04:3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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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어라는 책 자체가 그냥 심심풀이 땅콩먹기 책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겁니다. :)
From. 김현준 2015.02.09 18:5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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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웅에 대한 죽음도 분분하죠 정사에선 하후돈이 죽였다고 나오던것 같던데 아마 그 당시 관우가 하후돈의 병사로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촉의 빠였던 나관중이 관우가 죽였다고 적었을수도.. 덕분에 이 술이 식기전에 적장의 목을 따오겠소라는 말이 거의 진실이 되가고있죠 ㅋㅋ
From. 인육하니가 2013.01.26 15:0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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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륙이 묵구십에요 ㅋㅋ
From. 이런게 문제입니다. 2013.11.08 12:2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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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빛님께서도 말했듯 '심심풀이 땅콩먹기 책 정도로 생각하시면 됨' 이정도의 글을 이런 자극적인 내용을 다루게 되면 그대로 믿게 되는게 일반적입니다. 과연 누가 이걸 회상할때 '정사에도 없고 연의에도 없는 내용인데 그냥 심심풀이 땅콩인데 정욱이 인육먹었데' 이렇게 될까요? 이런글이 블로그에 10군대만 있어도 이건 10년 뒤 기정 사실처럼 될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되어있을거라고 생각되지만요.
[인물] 삼국지 - 유선(劉禪)은 현군(賢君)이었다(?)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20:43

게임 삼국지 Ⅸ의 유선

유선 그는 아두인가? 아니면 현군인가?


유선.. 보통 삼국지에서 최악의 인물로 평가됩니다. 그 이유는 유비,관우,장비,제갈양 등의 인물들이 힘들게 세운 촉을 패망의 길로 이끈 주범으로 지목되기 때문이지요. 아래 글은 '삼국지 해제'에 있는 글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으로 유선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있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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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해제 발췌)

유선(207~271)은 촉한의 2대 황제이다. 자는 공사(公嗣). 어릴 때 자는 아두(阿斗)이며 유비의 아들이다. 나관중의 '삼국지'에서 동탁, 조조, 여포, 다음으로 가장 혹평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유선의 실체를 분석해보면 나관중의 결론과는 완전히 다르다. 나관중의 '삼국지'에서는 유선에 대하여 그 허물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첫째, 막 제위를 계승했을 때는 범용한 군주였다. 둘째, 제갈량이 죽은 후 환관 황호를 총애하고 주색에 빠져 조정의 정치가 나날이 부패해갔다. 셋째, 위나라의 대장 등애가 성도로 진격해왔을 때 위나라에 항복하고 안락공에 봉해졌다. 넷째, 사마소가 연회를 열고 촉 출신의 사람들에게 촉나라 음악을 연주하게 하니 모두 눈물을 흘렸는데 유선은 태연히 촉의 일들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상이 유선의 대표적인 허물들이다. 그러나 촉 황제 유선에 대해서는 좀더 다른 각도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첫째, 유선이 범용하다는 것도 납득하기는 어렵다. 유선은 성품이 부드럽고 그의 느역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런 인상을 준 듯하다. 제갈량의 말을 빌리면, 유선은 "천성적으로 인애(人愛)가 있으셔서 아랫사람을 소중이 다룬다"고 하였다. 유선은 성격이 원만하고 무리하지 않으며 무슨 말이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아량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매우 편안한 인상을 주는 것이 마치 유비와 비슷하다. 경우에 따라서 제나라의 성군이었던 환공에 비기기도 한다. 촉한의 소열황제 유비가 죽은 이후 유선이 황제의 자리에 있던 41년 동안 촉에는 정변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위나라 조정이나 오나라 조정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둘째, 흔히 지적되는 것으로 촉 황제 유선은 정치에 무관심하고 주색잡기에 빠져 있고 환관황호가 정권을 좌우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갈량이나 강유가 유선의 재가 없이 군대를 움직인 적은 없다. 그러나 군주들 가운데 유선만이 주색잡기에 몰두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다른 군주들이 더 심했다는 것이 정사에 많이 나타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유선만큼 현명한 신하와 재상들을 거느린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제갈량을 비롯 장완, 비의, 동윤 등이 대표 적인 예일 것이다. 사실 제갈량의 생전에 중국 정벌의 기치가 드높았으나 강유의 지속적인 패전 이후로 유선은 위나라의 정벌을 무모한 전략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유선의 입장에서는 위나라와 일방적인 전쟁의 과정에서 오나라에게만 어부지리의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셋째, 결사항전도 없이 위나라에 항복하고 안락공에 봉해진 문제이다. 이 점도 당시의 사정을 분석한다면 얼토당토 않은 논리이다. 현실적으로 당시 촉은 전쟁에 너무 지쳐 있었다. 한실 부흥이라는 명분으로 그 많은 세월을 버텨왔는데 더 이상은 어려웠을 수도 있다. 유선의 입장에서 본다면 지금 당장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아마 그의 마음 속에는 한실 부흥이라는 명분을 포기한 지가 오래 되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유선이 위군의 공격에 대하여 무리하게 끝까지 항전하려 한다면 위나라 대군을 이기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모두 '개죽음'으로 몰고갈 상황이었다. 유선은 무슨 일이든지 억지로 추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왕은 '촉기'에서 "나라를 온전히 지키는 것이 상책"이라고 평하면서 유선은 총명하고 사리에 밝은 왕이라고 적고 있다.

세상에는 인간이 거스르기 힘든 대세가 있는 법이다. 고래로 하늘의 뜻을 따라는 자는 흥하고 그렇지 않으면 망한다고 하였다.촉은 건국 후 40여년 동안 전쟁만 해왔고 상대는 촉이 정벌하기에는 너무나 강한 나라였다. 민심은 지속적이로 이반되고 위군의 침입은 더욱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서 결사항전을 하여 백성들과 군인들을 모두 죽이는 것은 폭군이나 할 짓이다.

어떤 의미에서 사람이 자신의 기득권이나 욕망을 보전하는 데 급급하는 것보다 더 잘못된 일은 없을 것이다. 천하의 대세에 순응하는 것도 중요한 인생의 덕목이다. 특히 군주는 제일 먼저 천하의 안정과 백성의 안위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부질없이 싸워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기보다는 어차피 이길 수 없고 함락이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투항하는 것인데, 그것을 한 가지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될 일이다.

넷째, 사마소가 연회를 열고 촉나라 음악을 연주하게 하니 모두 눈물을 흘렸는데 유선은 태연히 촉의 일들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한 문제이다. 이 점도 분석이 옳지 못하다. 사마소는 촉의 황제 유선을 크게 환대하여 안락공에 봉하였다. 사마소는 유선이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주택, 일상용품, 비단 1만 필, 노비 100여 명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유선을 따라온 유선의 아들 유요와 신하 번건, 초주, 극정 등에게도 각각 작위를 내렸다. 사마소는 대학자로 이름이 높고 촉이 투항하는데 힘을 아끼지 않았던 초주를 양성정후에 봉했다.

사마소가 유선을 불러서 속내를 떠보기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을 때 유선이 얼굴에 아무런 표정 없이 과거 촉의 일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 사실은 정답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조조가 유비를 떠보기 위해 같이 술을 마시면서 용의 이야기를 했을 때 천둥이 치자 유비가 깜짝 놀란 흉내를 내어 위기를 모면했던 상황가 별로 다르지 않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위나라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촉의 부흥운동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강유가 등애와 종회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위군을 자중지란에 빠지게 한 사건이 분명히 유선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유선의 입장에서는 그 동안 최선을 다하여 천하의 대권을 두고 싸웠고 이제는 패배하였기 때문에 그 당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명하게 지는 것도 대장부의 중요한 덕목이다. 당시 촉은 이민족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것이 아니고, 중원에 다시 흡수되는 과정에서 양측이 천하의 대권을 두고 싸우다가 패배했기 때문에 승복하면 그만이지 오직 자신만이 천하통일에 명분이 있다고 고집하는 것은 더욱 잘못된 일이었을 것이다.

이상의 소론으로 볼 때 나관중의 '삼국지'는 유선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가 결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유선은 한마디로 현군(賢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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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스펙터 2009.03.01 08:0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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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듣고 가네요. 하지만 역시 공감하기가 쉽지는 않네요. 특시 세번째와 네번째 논리대로라면 매국노의 대명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이완용의 매국행위 역시 '현명한 선택'으로 비추어질 것만 같아서 말이예요.
From. Favicon of http://open2world.tistory.com 푸른빛 Open2World 2009.03.04 18:5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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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서도 그 내용 뒤에 언급했지만, 당시 촉은 당시 조선 또는 대한제국처럼 이민족(다른 민족)에서 나라를 빼앗기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민족인 중원세력에 의해 통일 당한 것 뿐입니다. 민족 중심적인 시점에서 보았을 때, 촉과 위는 우리나라의 신라, 백제 같은 관계이지요. 이런 시점에서 볼때 이완용은 다른 민족에게 나라를 팔아버린 셈이니 엄연히 다른 경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민족 중심적 사고는 우리나라나 일본, 중국 같은 동아시아에서 강하게 드러나는 면이 있지요. 유럽이나 미국 등은 민족보다는 국가 중심적 사고가 강하고요. 국가 중심적 사고로 보면 유선의 경우를 이완용과 같은 맥락에 올려놓을 수 있지만, 민족 중심적 사고로 보면 엄연히 다른 경우가 됩니다.
[인물] 삼국지 - 배신자들의 최후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20:30

삼국지 배신자의 대명사 여포

삼국지 배신자의 대명사 여포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 중 배신자들의 최후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역시 삼국지에서 배신자하면 여포가 떠오르죠. 이 외에도 여러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배신자들은 대부분 끝이 좋지 않았다는 것이죠. 역사적 교훈입니다. ^^


서황
- 신성에서 맹달의 화살을 이마에 맞고 죽는다. or 편안하게 죽는다.

맹달
- 사마의에게 잡히기도 전에 신의,신탐 형제에게 죽는다.

신의,신탐형제
- 집에서 편하게..

방덕
- 연의에서는 주창,정사에게는 관우에게 붙잡혀 참수당한다.

장합
- 위연의 도발에 걸려 어이없게 죽는다.

고람
- 조운에게 어이없게 죽는다.

양송
- 조조에게 참수당한다.

위연
- 마대에게 추격당해 죽는다.

미방
- 오에 항복했다 마충의 목을 가지고 촉에 다시 재항복 하지만 유비에게 죽는다.

부사인
- 미방과 동일

장달
- 장비를 죽이고 오에 항복하지만 정병이 사자로 갈때 압송되서 장포의 칼에 맞아 죽는다.

범강
- 장달과 동일

황충
- 정사에서는 편하게 눈감지만 연의에서는 오군의 매복에 걸려 화살맞고 본진으로 돌아
오지만 결국엔 죽는다. (정사에 기초)

한수
- 조정에 끝까지 반박하다 70세의 나이로 죽는다.

양흥
- 마초의 칼에 맞아 죽는다.

마완
- 역시 마초의 칼에 맞아 죽는다.

이감
- 편하게 죽는다.

후선
- 편하게 죽는다.

양추
- 편하게 죽는다.

전예
- 장수한다.

여포
- 조조와 유비에게 잡혀 참수당함.

감녕
- 사마가의 화살에 맞아 죽는다.

주태
- 이릉대전후 바람같이 사라진다.

장흠
- 형주탈환전 후 바람같이 사라진다.

당자
- ? (의문)

손수
- 당자와 동일.

강유
- 자살.

등애
- 아들과 같이 전속에게 죽는다.

종회
- 사마소군에게 잡혀 죽는다.

관구검
(정말 죽어도 싸요. ㅡㅡ^) - 사마사군에게 잡혀 죽는다.

제갈탄
- 사마소군에 잡혀 죽는다.

문흠
- 제갈탄에게 죽는다.

문앙
- 위에 항복해서 집에서 편하게 죽는다.

사마의
- 집에서 편하게 죽는다.

사마사
- 눈밑의 혹이 악화되서 죽는다.

사마소
- 집에서 편하게 죽는다.

사마염
- 말년에 사마충때문에 골머리를 앓다가 죽는다.

윤상
- 집에서 편하게 죽는다.

양서
- 집에서 편하게 죽는다.

하후패
- 전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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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정원 2008.10.05 01:2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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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연은 배신자가 아니라 충신입니다. 노망한 제갈량이 죽을때 양의한테 반골의 상이니 뭐니 지껄여 싸움을 부추켜서 역모로 죽은 비운의 맹장 입니다. 현대판 롬멜이라고 해야 하나.... 위연의 죽음으로 삼국은 위나라의 통일로.... 막을 내리고...
From. 2008.10.05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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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댓글입니다
From. 정원 2008.10.05 01:2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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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연은 촉나라의 전공이 많은 충직한 무장, 억울하게 마대에게 죽음....
From. 정원 2008.10.05 01:3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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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반역의 흔적은 없은 , 양의가 역모로 몰아서... 결국 양의도 자살하여 둬지고....
From. 정원 2008.10.05 01:4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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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기 직전 촉을 떠바치는 유일한 장군, 결국 억울한 죽음으로.... 복권되어야 할 인물 1호 - 촉의 위대한 맹장 위연 -
From. Favicon of http://open2world.tistory.com 푸른빛 Open2World 2008.10.05 17:4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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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연이 배신자 리스트에 올라온것은 물론 촉에 대한 반역도 있지만 (역모에 의하였든 아니든), 그 이전에 연의에는 유종의 신하로 있을 때 수문장을 죽인 사건.. 정사 연의에 다 나오는 한현을 죽인 사건.. 물론 그 의도가 어땠던 간에 모시던 주군을 배신한것은 사실이기에 위에 게재된 것입니다. 제갈량에게 한현을 죽이고 유비 진영으로 넘어온 위연이 그렇게 곱게 보이지 만은 않았을 겁니다. 주군이 잘못된 행동을 조금 한다고, 죽여버리는 행위를 다른 주군이라고 하지 않을 법은 없기 때문이죠. 능력은 출중했으나 만약을 위해 그를 역모로 죽일 궁리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From. 김진수 2009.11.28 21:3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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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2
From. 김진수 2009.11.28 21:3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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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이고요.
이릉대전 때 손권을 공격하지 말고 조조를 공격하는데 마초,마대,조운,장비와 같은 명장과 70만정예 군대를 보냈으면 촉이 삼국을 통일 했을 텐데 안타깝군요.
From. Favicon of http://open2world.tistory.com 푸른빛 Open2World 2009.12.05 22:1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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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쉽지는 않았을 거에요. 전쟁이란 것은 지휘하는 장수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예전에는 소위 말하는 '쪽수'도 상당히 중요했으니까요. 당시 위나라 병력은 촉과 오를 압도했습니다.
From. 김진수 2009.11.28 21:3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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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호로곡에서 사마의 부자가 죽었다든가.
From. 김진수 2009.11.28 21:3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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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호로곡에서 사마의 부자가 죽었다든가.
From. 김진수 2009.11.28 21:3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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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로 같은 말을 두번 했군요.
From. 질문이여 2010.05.11 20:4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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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구검이 누군가여?... 이상한 질문이지만 들어본적이 ㅋㅋ
From. ㅁㄴㅇㄹ 2010.06.26 00:2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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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황, 방덕, 감녕, 주태, 장흠, 황충 등은 모두 충신으로 알고있습니다만?

다들 대의를 위해서 삼국에 투항한걸로 알고 있는데요?
From. ㅁㄴㅇㄹ 2010.06.26 00:3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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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황 - 이각의 횡포를 보면서 떨어진 충성심에 만총의 설득으로 위에 귀속..

방덕 - 마초와 마대는 촉에 투항하지만 방덕은 그때 병에 걸려 투항치 못하고
조조의 한중공략때 항복하고.. 형주 공방전에서 관우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깨끗하게 죽음. 반면 같이 잡힌 우금은 관우에게 목숨을 구걸했다함.

감녕 - 유표의 멸망을 알아차리고 오에 투항. 이릉전투때는 중병에 걸렸음에도
전투에 출진. 사마가의 화살에 맞고 전사.

주태 - 손책의 오군평정때 장강의 도적으로 살다가 손책에게 귀순.
후에 손권이 위험에 처할때마다 한몸 바쳐 손권의 목숨을 구했다고함.

장흠 - 주태와 같음. 형주공방전에서 관우에게 항복을 권했음.

황충 - 한현군이 멸망하자 황충은 병에 걸렸다 거짓말하며 자택에서
재야생활을 보내려하지만 유비가 직접 등용을 몇번이나 해오자
그에 감동해 유비에게 귀속하였다고함.

장합 - 관도전에서 오소가 습격당하자 곽도는 고람과 장합에게 책임을 덮어씌워
장합은 그를 믿는 원소의 그릇을 알아차리고 조조에게 항복.
북벌때 사마의의 촉군 추격명령 반대하지만 할수없이 출전하여
복병에 의해 전사.

고람 - 장합과 같음.
From. ㅁㄴㅇㄹ 2010.06.26 00:4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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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용엔 배신자들은 대부분 끝지 좋지 않다지만..

편하게 죽은 분들도 많네요.
From. Favicon of http://open2world.tistory.com 푸른빛 Open2World 2010.06.29 08:1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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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자에 대한 정의에 따라 리스트에 들어가는 장수들이 조금 달라질 것으로 생각되네요. 오래전 글이라 지금은 저도 생각이 조금 달라진 부분도 있고요. 상당히 분류하기 어려운 문제 같네요. 그래도 분명한 것은 배신자들의 최후가 대부분은 좋지 않다는 것... 그리고 편안하게 죽었다 하더라도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
From. ㅇ 2012.02.18 23:1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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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그럼 황충이 배신을 했다는 뜻인가요?
황충 무리하게 적진에 갔다가 죽은거아닌가
From. Favicon of http://open2world.tistory.com 푸른빛 Open2World 2012.02.20 00:5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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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충은 본래 한현의 신하였지만 유비에 붙습니다.
From. ㅇ 2012.02.18 23:1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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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황충 강유가 누구한테 배신했나요
From. Favicon of http://open2world.tistory.com 푸른빛 Open2World 2012.02.20 00:5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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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는 본래 위나라 신하입니다.
From. jwhwang00@naver.com 2012.06.29 21:1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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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초는 안끼네요?
From. Favicon of http://open2world.tistory.com 푸른빛 Open2World 2012.07.01 17:0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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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를 배신했다고 볼수도 있지만 조금 애매한 것 같네요. :)
[인물] 삼국지 - 가후 문화(賈珝 文和), 중화사상에 희생된 서량인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20:22

게임 삼국지 Ⅸ의 가후

게임 삼국지 Ⅸ의 가후



가후(賈珝)는 강(羌)족 땅에 가까운 무위군(武威郡) 고장현(姑臧縣) 사람으로 자는 문화(文和)이고 147년에 태어나 223년에 죽은 조조군의 참모이다.

가후는 본래 우보의 책사였다. 그 후에 동탁이 여포에게 살해 당하자 가후는 이각의 참모가 되어 장안을 칠것을 주장한다. 또한 마등군을 지구전으로 격파했으며 장안 복구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이각과 곽사가 대립하자 가후는 헌제를 안심시키고자 이각과 곽사를 공멸시키는 비책을 써서 대립을 심화시켰다, 그 뒤에 이각의 눈밖에 난 가후는 장제가 머무르고 있던 완성으로 도망친다.

그 후 197년 조조가 장수를 공격할 때 가후는 장수에게 항복을 제안했다. 하지만 조조는 장수의 숙모를 범하고 장수가 이에 분노하자 가후는 전위를 술에 취하게 한 뒤에 기습공격을 하여 조조군을 무찌른다.

198년 조조가 완성으로 쳐들어 올때 가후는 신묘한 책략으로 조조군을 당황시키게 하였고 그 때를 노려 추격하다 패배한 장수에게 '조조군은 후위가 약하니 한번 더 공격하면 승산이 있습니다' 라는 진언을 올리고 유표를 끌어들여 조조군을 크게 격파했다.

그 뒤 장수와 함께 조조한테 항복한 가후는 관도대전때 고람, 장합으로부터 조조군의 본진을 지키고 위수 전투에서 한수와 마초를 이간질시켜 마초군을 패주시켜 조조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활약을 하였고 조조가 후계문제로 갈등할때 원소와 유표의 예를 들어 조비를 다음 후계자에 올리도록 공헌을 하였고 조비가 즉위하자 태위가 되었다.

그 뒤에 조비가 섣불리 촉을 공격하려고 하자 가후는 2번씩이나 만류했지만 조비는 공격을 감행 그리고 위군은 2번 모두 패한다. 그리고 가후는 223년에 사망하게 된다.

그러나 가후는 삼국지 연의에서 중화사상에 의한 영향으로 많이 비하되게 된다. 실제로 가후가 태어났던 무위는 강(羌)족과 가까운 땅으로 옛부터 이민족이 많았다고 하는데 가후는 아마도 이민족 출신이거나 혼혈이기 때문에 정통 중국인들한테 천대를 받았을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가 행한 일들을 나열하자면 삼국지에 버금가는 분량에 달할것이다.

중화사상에 희생된 서량인 가후...

그는 어쩌면 조조 진영의 최고의 책사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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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dd 2011.11.01 11:3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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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 삼국지로 보면 삼국지 최강의 모사는 가후이죠.
제갈량+주유 합친수준.. 제갈량은 실제 정사에서는 행정 및 군수에 탁월했고
전술 전략에서는 연의처럼 뛰어나지는 못했죠.
[인물]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서의 인물평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19:55

본 글은 정사 삼국지에 있는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정사 삼국지는 '진수'가 편찬한것으로 나관중, 배송지의 연의와는 확실히 색다른 맛이 있습니다. 연의와 비교하면 조금더 객관적인 입장에서 글을 써서 약간 딱딱한 감도 있죠.

아래는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평을 몇개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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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

유비는 도량이 넓고 의지가 강하며 마음이 너그러웠으며, 인물을 알아보고 선비를 예우했다. 그는 한고조의 풍모를 갖고 있었으며, 영웅의 그릇이었다. 그가 모든 국가와 태자를 보좌하는 일을 제갈양에게 부탁하고, 마음으로 의심이 없었던 것은 확실히 군신의 지극한 공심이며 고금을 통해 가장 훌륭한 모범이었다. 유비는 임기응변의 개간과 책략에 조조에 미치지 못했지 때문에 국토또한 협소했다. 그러나 좌절해도 굴복하지 않으며, 끝까지 조조의 신하가 되지 않았다. 아마도 조조의 도량으로는 틀림없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 할 것으로 예측하여 그와 이익을 다투지 않았으며, 그래서 해를 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방통 & 법정

방통은 인물을 품평하기를 좋아하고 경학과 책모에 뛰어났으므로, 그 당시 형,초, 사람들은 그를 고아하고 준수한사람이라고 했다. 법정을 일의 성공과 실패를 정확이 예견할 수 있었으며, 기이한 계획과 책술을 소유한 사람이였지만, 평소 덕성으로써는 칭찬받지 못하였다. 이들은 위나라의 신하들과 비교하자면, 방통은 순욱의 형제벌이고 법정은 정욱,곽가의 무리이다.


*조조

한나라 말기는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영웅 호걸이 동시에 군대를 일으켰다. 그 중에서 원소는 4주를 근거로 하여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으며, 그의 강성함은 대적할 자가 없었다. 조조는 책략을 이용하고 계략을 세워 무력으로써 천하는 정복하였다. 신불해와 상앙의 치국 방법을 받아들이고, 한신과 백기의 기발한 책략을 사용하였다. 서로 다른 재능이 있는 자에게 관직을 주고, 각 사람이 갖고 있는 기능을 이용하며 자기의 감정을 자제하고 냉정한 계획에 따랐다. 옛날의 악행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마침내 국가의 큰 일을 완전히 장악하고 대사업을 완성시킬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명석한 책략이 다른 사람에 비해 가장 우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비범한 인물이며, 시대를 초월한 영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언 & 유장

옛날 전한 초기에 위표는 허부의 말을 듣고 박희를 아내로 맞이 하였고, 유흠은 도참의 문자를 보고 이름과 자를 바꾸었지만, 끝내 몸은 그 위험을 면하지 못하였고, 두 군주(전한의 효문제,후한의 광무제)에게 그 행운이 주어졌다. 이것은 신명이란 헛되이 구할수 없고, 천명은 망령되이 원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에 대한 필연적 증거이다. 그런데 유언은 동부의 말을 듣고, 익주 땅에 마음을 두고, 점치는 사람의 듣고 오씨와의 혼인을 구하고, 급히 천자의 수레와 관복을 만들고 황제의 자리를 훔치려고 기도했다.그의 미혹됨은 심하다. 유장의 재능은 영웅에 미치지못했지만, 땅은 차지하고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소인이 군자의 지위를 빼앗아 두둑이 되는 것은 자연스런이치이다. 그가 익주목의 지위를 탈취한 것은 불행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조비)

문제는 천부적으로 문학적 소질이 있었으니, 붓을 대면 문장이 되었고, 넓은 지식도 갖추 고 있었고, 기억력이 탁월해 다방면으로 재능을 갖추었다. 만일 여기에 그의 도량이 약간만 더 크고 공평한 마음 씀씀이에 힘쓰며 도의의 존립에 노력을 기울이고 덕망있는 마음을 더욱 넓힐수 있었다면 옛날의 현명한 군왕이 어찌 그로부터 멀리 있었겠는가?


*명제(조예)

명제는 침착하고 굳세며 결단력과 식견을 갖추고 있었으며, 마음에 임하여 행동하고, 백성들에게는 군주의 지극한 기개를 갖추고 있었다. 그 당시 백성들은 생활이 피폐하고 온 천하는 분열 되었으나, 조예는 선조의 빛나는 대업을 먼저 생각하거나, 왕업의 기틀 을 다지지 않고 진시황이나 한무제를 급히 모방하여 궁전을 지었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원대한 관점으로서 헤아리면 이는 아마도 결점인 지인저!

*황권, 이회, 여개, 마충, 왕평, 장의

황권은 학식이 넓고 아정하며 도량이 넓었고, 이회는 공정하고 정직했으며 공업에 뜻을 이루었고, 여개는 절개를 지켜 옮기지 않았고, 마충은 온순했지만 과감하게 결단하고, 왕평은 충성스럽고 용감하고 엄정했으며, 장의는 식견이 탁월하고 과단성이 있었다.이들이 모두 자신의 장점에 의지하여 명성을 날리고 자취를 나타낼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필요 하는 시대를 만났기 때문이다.


*제갈양

제갈량은 나라의 승상으로서 백성을 따뜻이 어루만지고, 예의와 규범을 보여주었으며, 벼슬자리를 줄여 백성의 짐을 덜고, 권위와 제도를 따랐다.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탬이 된 자는 비록 원수일지라도 반드시 상을 주었고, 법을 어기거나 일을 게을리한 자는 비록 가까운 이라도 꼭 벌을 주었다. 죄를 지었더라도 스스로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하는 자는 비록 그 죄가 무거워도 놓아주었으며, 교묘한 말로 변명하려 드는 자는 비록 그 죄가 가벼워도 꼭 벌주었다. 작은 일을 작다 하여 포상하지 않는 일이 없고, 나쁜 짓도 작다 하여 꾸짖지 않는 일이 없었다. 모든 일을 곰곰히 살펴 행하고 사물은 그 근본을 헤아려 다스렸다. 명분을 따르되 실질도 잃지 않았고, 거짓된 것은 아예 입에 담지 않았다. 마침내 나라 안이 모두 두려워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했는데, 다스림과 죄 줌이 비록 엄해도 그를 원망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음씀이 공평하였으며, 경계하는 것과 권하는 것이 뚜렷해서였다. 실로 다스림이 무엇인지를 아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할 만하다. 관중이나 소하에 견줄 만하다.


*손등, 손려, 손화, 손패, 손분

손등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일이 있고, 아주아름다운 덕행을 이루기에 충분 했다. 손려와 손화는 모두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있고 엄격하게 자신을 연마 했지만, 어떤 사람은 단명하여 일찍 죽었고, 어떤 사람은 부득이 죽게 되었으니, 애석하구나! 손패는 서자의 신분으로 적자의 지위를 구했고, 손분은 법령과 제도를 준수하지 않아 진실로 위험하고 멸망하는 길을 취했다. 그러나 손분과 그 일족이 주살 된 것은 뜻밖에 날아온 재앙이였다.


*반준, 육개

반준은 공정하고 청렴하며 과단성이 있다. 육개는 충성스럽고 호방하며 질박스럽고 솔직하다. 이 두사람은 모두 절개가 빛났으며 대장부의 기백이 있었다. 육운은 일신을 청결히 하고 사업을 이루었으며, 남쪽 땅에서 명성이 빛났으므로 훌륭한 목이었다고 볼수 있다.


*유봉, 팽양, 요립, 이엄, 유염, 위연, 양의

유봉은 시기하는 입장에 있었으므로 자신을 지키는 대책을 충분히 세우지 못했다. 팽양과 요립은 재능에 따라 발탁 되어 승진 하였고, 이엄은 재간에 의해 영달하였으며, 위연은 용맹함으로써 임명 되었고, 양의는 실무처리 능력이 출중했으며, 유염은 옛날부터 임명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조정에서 존중을 받았다. 그들의 거동을 관찰하고 그들의 언행이 예법에 부함되는지의 여부를 살펴보면, 그들이 초래한 재앙과 허물은 그들 자신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이 없다.


*정욱, 곽가, 동소, 유엽, 장제, 유방

정욱.곽가.동소.유엽.장제는 재능과 책략,모략, 등에 있어서 세상의 기사이다. 이들은 비록 청아하게 덕행을 수행함에 있어서는 순유와 다른면이 있었지만, 계책을 짜고도모하는 것은 오히려 순유와 같은 범주이다.유방은 문사가 유려하였고, 손자는 근면하고 삼가하여 두사람 모두 제왕의 중요한 정책을 관장했다. 권세가 그 당시 유명했으나, 아정하고 청량함은 부족 하였고, 조롱과 야유의 평가가 이들의 실제 모습을 매번 능가하였다.


*하후돈, 하후연, 조인, 조홍, 조휴, 조진, 조상, 하후상, 하후현

하후씨와 조씨는 대대로 인척관계가 되었으므로, 하후돈과 하후연,조인,조홍,조휴,조상, 등은 폐부와 같은 친구로 그 당시에 고귀한 관직에 있었으며, 군주의 곁에서 공헌을 세워 모두 공로가 있었다. 조상은 덕이 적은데도, 관직이 높아 이성을 잃고 탐닉하였으니, 이러한 것은 진실로 <대역>에 명시된 대로 도가가 기피하는 바이다. 하후현은 엄격하고 도량이 있어 세간에 이름이 알려졌고, 조상과 조정의 안팎으로 깊숙하게 연결되어 영광스러운 자리가 이와 같았으나, 일찍이 그가 조상의 잘못을 바로잡거나 훌륭한 인재를 불러 받아들였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다. 이 점을 들어 판단해 본다면, 어찌 비운의 최후를 면할수 있었겠는가!


*최염, 모개, 서혁, 하기, 형옹, 포훈, 사마지

서혁,하기,형옹은 엄격함을 존중 하였고, 그 시대의 명사가 되었다. 모개는 청렴하고 공정했으며 행적이 맑았고,사마지는 충성스럽고 밝았으며 바르지 못한 곳에 빠지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동요되지 않은 사람들이였다. 최염은 품격이 높고 가장 우수했으며, 포훈은 바른길로 견지하여 결점이 없었다. 그러나 이 두사람 모두 죽음을 면하지 못했으니 애석하구나!<<시경>><대아>에서는 '이미 밝고보 밝아라'를 귀하게 여겼고, <우서>에서는'충직하고 온화하다'는 것을 숭상했는데, 스스로의 재능을 겸비하지 않았다면, 누가 이것을 할수 있으랴!

참고로 최염의 모함으로 노예가 되었다가 나중에 조조에게 죽음을 당했다.최염은 세인들에게 가장 비통하고 애석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모개는 최염이 조조에게 죽은것을 불쾌한것을 알게되자 어떤사람이 모함을 하였고,간신히 환계,화흡,등의 사혐만은 면하고 파면당하고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포훈은 조비에게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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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삼국지의 여인들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19:48

이 글을 읽기 전에 알아두셔야 하나 있습니다. 아래 글은 연의에 입각해 쓴 글입니다.
정사만 가지고 여인들을 소개하기에는 내용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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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의 여인들


1. 초선

동탁을 없애기 위해 왕윤은 먼저 여포에게 초선을 보내겠다고 약속해 놓고 동탁에게 보낸다. 두 사람을 이간시키기 위해서다. 애욕에 불붙은 여포가 초선을 몰래 찾아가 희롱하고, 이를 눈치챈 동탁은 여포를 없애려한다. 하지만 결국 동탁이 여포에게 참살당하고 만다.

천애고아였던 초선은 어릴 때 자신을 데려다 고이 길러준 사도 왕윤을 흠모해 왔고, 그를 위해 꽃 같은 제 몸을 바쳐서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고 자결함으로써 보은과 충절을 함께 한다.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열사가 되기도 하고 또 나라를 팔아먹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열사가 많은 시대는 불행한 시대이다. 처녀열사까지 나오는 시대는 참으로 불행한 시대이다.


2. 미부인(유비의 조강지처)

장판파전투에서 조조군에게 대패한 유비는 처자까지 적진에 둔 채 쫓기고 있었다. 맹장 조자룡이 유비의 처자를 찾으러 단기로 적진을 뚫고 들어갔다. 아수라장 속에서 우물가에 쓰러져 있는 미부인을 발견했다. 세자인 아두를 품에 안고 있었다. 속히 말에 오르기를 재촉했다. 그러나 미부인은 세 사람이 먼저 오르면 모두 살아남을 수 없음을 알고 아두만이라도 살려 후사를 잇게 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하고 우물 속으로 뛰어들고 만다. 남편을 따라 전장에서 온갖 고초를 겪어오다 장렬한 최후를 마친 용결의 국모 미부인은 죽어서 왕후의 시호도 받지 못했다. 그 때 살아난 아두에 의해 정작 소열황후로 추서되어 유비와 합장된 여자는 아두의 생모인 감부인이었으니......


3. 이교 자매(오나라출신. 삼국지의 최고 미인)

대교는 오나라의 군주였던 손책에게 소교는 대도독인 주유에게 시집갔다. 삼국 군웅의 지혜가 총동원되는 삼국지 최대의 격전인 적벽대전은 강북을 제패한 조조가 여세를 몰아 강남의 오나라까지 토벌하여 단숨에 중원을 통일하려고 일으킨 역사적인 전투이다. 그러나 이 싸움의 배경을 좀 더 들여다 보면 이교에 대한 조조의 연정(?)이 깊숙히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장에서도 미인을 보면 처녀나 유부녀를 가리지 않고 염문을 뿌렸던 조조가 절세가인 듀엣을 그대로 놓아둘 리 없었다. 하북의 풍광좋은 강가에다 동작대라는 휘황찬란한 궁전까지 지어놓고, 이미 남의 아내가 된 이교를 데려다 만년에 노리개로 삼겠다고 호언하며 오나라로 쳐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제갈량이 주유에게 이 얘기를 해주자 열받은 주유가 화친하자는 분위기에서 전쟁을 결심하게 되고 결국 조조는 대패하여 이교의 손목도 한 번 못 잡아보고 패주한다.


4. 황월영(제갈공명의 부인)

신기와 혜안을 지닌 공명은 지극히 평범한 여자를 정확히 말하면 지독히 박색한 여자를 아내로 맞았다. 명문가의 딸로서 학식과 교양은 갖추었으나 키는 작달막하고 머리는 노랗고 얼굴은 검은데다 좀 얽었고.... 어쨌거나 금슬은 좋았다는데....


5. 추씨(鄒氏)

추씨는 표기장군 장제의 아내였다. 조조가 대권을 잡은 지 얼마 안되어 유비와 함께 여포를 치려고 할 때였다. "장제가 관중으로부터 남양을 치다가 화살에 맞아 죽자, 장제의 조카 장수가 대신 무리를 통솔하고 지금 허도를 치고 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조조는 크게 노하였다. 곧 하후돈에게 15만 군사로 장수를 치게 하였다. 대군이 육수에 이르러 영채를 세우니, 참모 가후가 장수에게 전한다.

"조조 군사가 워낙 강하니 도저히 대전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항복하시는 것이 상책일 것 같습니다." 장수는 가후의 말을 옳게 여겨 조조에게 항복하니 조조는 그들을 후히 대접한다. 조조가 연일 잔치를 벌이다가 우연히 장제의 처 추씨를 보고는 그 미모와 목소리에 빠진다. 그리하여 추씨는 조조와 성밖으로 나가 편히 지낸다. 조조는 부하 전위로 하여금 방 밖을 지키게 하고는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막는다. 조조와 추씨의 관계에 대한 소문은 마침내 장수의 귀에 들어갔다. 이에 장수는 크게 노하였다. 몰래 군사를 동원해 조조의 영채를 공격한다. 사면이 불바다를 이룬 가운데 조조는 화살을 맞고 추씨를 버린 채 간신히 몸만 빠져 나왔다.

그 후 추씨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으나, 아마도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며 여생을 보냈을 것이다. 조조는 그 와중에 맏아들 조앙과 조카 조안민을 잃고 명장 전위는 조조가 뒷문으로 도망가도록 채문 앞을 지키다 전사했다.


6. 축융부인

축융부인은 공명이 남만 정벌을 할 때 등장하는 남만왕 맹획의 부인이었다. 축융부인은 승마에 능하여 말 위에서도 활쏘기를 잘 하였고, 단검 던지는 솜씨도 뛰어난 여전사였다. 축융부인과 접전을 벌였다가 촉의 부장 장의와 마충도 포로로 잡힐 만큼 무예가 출중한 여성이었다. 축융씨의 후예라 불리는 집에서 맹획에게 시집온 축융부인은 술도 잘 마시고 성격도 남자처럼 호탕했을 정도이니 남편 맹획은 부인에게 꼼짝도 못했을 것 같다. 여성으로 태어나 보기 드물게 전쟁에 참가한 여걸이라고 할 수 있다.

7. 손부인

주유는 형주를 넘겨받지 못하자, 손권의 여동생을 이용한 미인계로 유비를 오나라로 불러들여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먼저 유비와 손권의 여동생을 결혼시킨다는 전략을 세워 유비를 오나라로 초청한다. 그러나 주유의 미인계를 이미 간파한 공명은 한 수 높은 계책으로 유비와 손부인을 정식으로 결혼하게 한다. 당시 손부인의 나이는 세상물정 모르는 18살이었다.

주유는 암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유비를 동오에 머물게 할 계책으로 호화로운 궁전을 지어 그곳에 머물게 한다. 그리하여 유비는 편안한 생활에 점점 빠져들게 된다. 그러나 공명의 계책은 조자룡에게 전달되어 유비는 정신을 차리고 손부인과 무사히 동오를 탈출한다.

주유는 미인계의 실패로 낙담하고, 그 후에 손권의 책략으로 손부인의 오국태가 병이 났다고 속여 손부인을 유비의 아들 아두와 함께 동오로 되돌아오게 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조자룡이 중간에서 아두를 찾아오게 되어 하는 수 없이 손부인만 동오로 돌아왔다.

동오로 돌아온 손부인은 주유와 손권의 계략에 의해 결혼한 사실을 알고 슬퍼한다. 어떤 설에는 손부인은 유비쪽을 향해 강물에 투신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손부인은 그 이후로는 유비에게 되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손부인은 전쟁의 와중에서 계책에 의한 허무한 결혼을 한 , 기구한 운명을 맞이한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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