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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삼국지 - 장판파 전투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22:22

장비의 활약상이 돋보였던 장판파 전투입니다. 역시 연의를 바탕으로 한 설명입니다. 실제로 그랬을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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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판 파 전 투 >



[주야로 삼백리를 달려]


관도전투 이후로 8년이라는 세월동안 기주에 있는 원소의 잔당을 모두 싹쓸어 버리고 화북(華北) 8주를 소유한 조조는 건안 13년(208년) 7월 우금, 장료, 장합, 주령, 이전, 노초, 풍개 등 7군, 약 8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형주(荊州) 정벌에 나섰다.

마침 그때, 형주에서는 목(牧 : 지금의 장관)의 자리에 있던 유표가 죽고 차남인 유종이 막 뒤를 이은 상태였었다. 유종은 조조의 공격에 넋이 빠져 제대로 한번 싸우지도 않고 항복해 버렸다.

당시에 유비는 한수 북쪽 기슭에 있는 번성을 수비하고 있었는데 유종의 완전항복은 유비를 제쳐두고 이루어졌다. 유비가 조조와 유종의 일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조조군이 가까운 남양군의 완(宛)까지 쳐들어 온 후였다.

유비일행은 조조군의 발자욱소리를 등뒤로 하며 남쪽으로의 도피행을 시작했다. 한수를 건너 양양에 다다를 즈음, 유비를 존경하던 유종의 부하를 비롯하여 형주 백성들이 연이어 유비일행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당양에 도착했을 때에는 유비를 따르는 피난민이 10만여명, 가재도구를 실은 마차도 수천대에 이르렀다. 그 때문에 하루에 고작해야 10리정도씩 밖에 나아갈 수 없었다. 그러자 유비는 막신(幕臣) 관우에게 수백척의 배를 모으게 하여 난민을 태우고 먼저 강릉으로 향하게 하였다.

부하들은 "대장이 먼저 급히 가셔서 강릉을 지켜야함이 마땅합니다. 이 많은 난민들을 떠맡고 싸우기엔 전투인원이 너무 부족하므로 조조군이 쳐들어오게 되면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라고 말했으나 유비는 "모든 일의 근본은 백성이다. 나를 따르는 자들을 어찌 버린단 말인가! 라며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조는 요충인 강릉지역에 풍부한 군사용품이 비축되어 있어서 유비가 그 곳으로 도망치면 왠만한 방법을 써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뒤쫓아가기 위해 짐이 되는 병참대(뒤에서 인마나 군수품의 보충, 운반 따위를 맡아보는 부대)를 떼어놓고 전투요원만을 이끌어서 양양으로 가는 길을 서둘렀다.

양양에 도착한 조조는 유비가 이미 통과했다는 것을 알고는 서둘러 5천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추격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루에 300리 이상을 계속 달려가 결국 당양의 장판파에 이르러 유비일행을 따라잡게 되었다. 장판파의 싸움은 이렇게해서 시작되었다.



[조운(趙雲), 유비의 처자를 구하다]

조조는 많은 인명을 살륙하였고 유비군은 이 전투에서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이때 허겁지겁 도망치는 유비군의 후위부대의 역을 맡은 자가 바로 장비이다.

후위부대는 힘들고 많은 책임이 따르는 중대한 역할로서 특히 전투에 패했을 때에는 더욱더 그 임무가 막중하다. 따라서 이 역할은 원래 경험이 풍부한 명장이 아니면 해낼 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논어>에서는 공자(孔子)가 맹지반(孟之反)을 칭찬했던 구절이 나온다.

'맹지반은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지 않는 남자다. 패군의 후위부대를 맡았을 때 자기쪽 성문을 빠져나가면서도 말에 채찍질을 가하며 <이 녀석이 제대로 달려 보지 못했기 때문이지 내가 후위부대를 맡았기 때문이 아니다>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공자도 후위부대의 고충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장비가 이끌었던 후위부대는 고작해야 스무명 남짓했다. 이는 유비의 군대가 얼마나 빈약해는가를 가늠케 한다. 정기병대 오천명을 선발했던 조조는 유비군의 상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장비는 우선 장판교를 막고 서 있었다. 냇물을 방패삼아 이용한 것이다. 이윽고 조조군이 도착했다. 그러자 장비는 적을 노려보며 창을 쥐고선 "내가 바로 장익덕이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놈 있느냐?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상대 적은 모두 겁에 질려 멍하니 서 있을뿐이었다.

장비는 그렇게 해서 얼마간은 적을 막아냈으나 결국 다시 조조에게 추격당해 장비, 공명, 조운은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이 때 유비의 처자가 행방불명되자 조운은 수십명의 부하를 이끌고 전쟁터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우여곡절 끝에 조운은 유비의 아들 유선과 감부인을 무사히 구출해 냈다. 그 때 조운이 적군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본 사람이 '그가 적에게 항복했다'라고 급히 알리자, 유비는 그 자를 꾸짖으며 '조운은 나를 버리고 도주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한다.

조운이 유선일행을 호위하며 되돌아 온 것은 그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유비가 조운을 얼마만큼 신뢰했는지를 알 수 있는 이야기이다.


[겨뤄 보고 싶은 자 있거든 이름을 대고 나와 봐라!]

이것이 사서에도 나와있는 장판교(長坂橋) 싸움의 유명한 대사이다. 물론 연의에서도 가장 볼만한 장면 중 하나이다.

조조의 장수 문빙이 조운을 쫓아 장판교까지 따라오자 장비는 거친 수염을 곧세우고 왕방울만한 눈을 굴리며 창을 쥐고 다리 중간 지점쯤에 딱 버티고 서 있었다. 문빙은 얼떨결에 말을 세웠다.

연이어 위의 이름난 장수들이 한꺼번에 몰아 닥쳤으나, 다시 위에 서 있는 장비와 숲속에서 일어나는 모래먼지를 보고 공명의 계략인 줄로만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누구하나 나서는 자가 없었다. 그 모래먼지는 장비가 스무명의 부하들을 숲속에 매복시켜서 말의 꼬리르 나뭇가지에 묶게 하고는 말들을 달히게 한 것이었다. 그러면 숲에서 자욱한 모래먼지가 일어날테고 마치 많은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는것처럼 보이게 했던 것이다.

곧이어 급한 전갈을 듣고 조조가 친히 달려왔다. 죽 늘어선 깃발 중에 큰 도끼문양의 비단양산을 발견한 장비는 조조가 합세한 것을 알아차리고 '난 연나라 사람 장익덕이다. 나랑 겨뤄보고 싶은 자 있으면 이름을 대고 나와라!' 라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우뢰와 같은 우렁한 목소리에 조조군의 장수들은 오싹 온 몸이 저려 왔고 조조는 황급히 양산을 숨기게 되었다.

"전에 관우로부터 '동생인 장익덕은 백만명의 적에게 포위당해도 주머니 속의 물건을 꺼내듯이 대장의 목을 치는 장수'라는 얘기를 들었느데 역시 듣던대로군."

하고 조조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또 다시 장비의 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조는 엉겹결에 도망칠 자세를 취했다. 장비는 적들이 동요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덧붙이기를 '싸우겠다는 건가 안 싸우겠다는 건가? 어느 쪽이냐?' 라고 호통쳤다. 그러자 그 순간 조조의 바로 옆에 있던 하후걸이 너무 놀란 나머지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것을 본 순간 조조가 말머리를 휙 돌렸고 조조의 병사들도 앞을 다투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것이 연의에 씌여진 장판교 싸움인데 이 싸움에서 장비는 그의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관우도 장비 못지않게 용감하나, 침착하고 온후하며 사려깊은 면이 있다. 장비는 순진할 정도로 행동파인데다 4.3미터나 되는 긴 창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싸움이 격해지면 격해질수록 불처럼 타올라 적을 무찌르는 호걸타입이다.

장판교 싸움에서는 많은 숫자의 병력이 단 한 사람의 큰 고함소리에 도망쳐 버린 결과가 되었다. 만약 장비의 보고가 없었더라면 그 뒤에 벌어지는 <적벽대전>에서 유비군은 승리를 맛볼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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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삼국지 - 적벽 대전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22:18

삼국지에서 최대 전투로 알려진 '적벽 대전'에 대한 소개 입니다. 연의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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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 벽 대 전 >


동남풍을 이용한 화공계(火攻計)

건안 13년(208) 12월의 한밤중 장강 북쪽 강가에 있는 오림에서의 일이었다.

때마침 동남풍을 타고, 남쪽 강가에서 조조의 군대로 접근하는 한떼의 군선들이 있었다. 오군의 장수인 황개(黃蓋)가 인솔하는 열 척 남짓의 몽충함과 투함이었다.

배 위에는 장군 깃발과 용이 그려진 깃발이 휘날리고, 배 전체가 빨간 장막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야말로 조조도 속을 정도의 위장이었다. 장막 내부는 기름을 부은 마른 풀과 장작으로 가득차 있었다.

황개는 조조에게 이미 거짓으로 항복할 것을 알린 상태였기 때문에, 조조는 황개를 전적으로 믿고 있었다. 황개는 장강의 한 가운데를 건너자 마자 불을 붙인 횃불을 들고 부하들에게 큰소리로 항복을 외치게 했다. 조조군의 군사들은 안심하여 공격해 오지 않았다.

배가 조조군의 진영으로 2리(800미터 남짓)정도의 거리로 가까워지자, 황개는 일제히 배에 불을 붙였다. 불로 뒤덮인 배가 조조군의 진영으로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조조군의 배들은 운나쁘게도 모두 밧줄로 연결되어 있었다. 완벽하게 방어하기 위해 연결한 것이었지만, 완전히 예상을 뒤엎는 결과가 된 것이었다. 불붙은 황개의 배가 부딪쳐 조조군의 배에 불이 옮겨붙기 시작했다. 커지는 불꽃은 밤하늘을 밝히고, 대 가람(절의 큰 건물)의 불꽃놀이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일대 불바다를 이루었다.

그리고 물에 빠진 군사들과 말이 어찌할 바를 몰라 허우적거리고 말의 울음소리와 사람의 비명이 뒤섞여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불에 타 죽거나 불을 피하려다 끝내 물에 빠져 죽은 군사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불은 육지에 있는 병사에까지 옮겨붙게 되었다. 실로 지옥과 같은 장면이었다.

이런 상황을 반대편 강가에서 바라보고 있던 오군의 도독 주유는 전군에 총공격을 명했다. 북을 울리고 공격을 개시하는 정예 군사들.

극도로 혼란해진 조조의 군대는 대항하지도 못한채 흩어져 도망갔다.

조조 자신도 몇명 안되는 부하들에게 보호되어 간신히 사지를 벗어나, 후방 거점인 강릉으로 무사히 달아났다. 주유는 그런 조조를 계속하여 추격했다.

지치고 굶주린 조조군, 넋없이 화장되어...

이렇게 해서 조조는 쓰라린 일패를 맛보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왜 조조의 군대는 오림에서 20만의 대군을 거느리고도 단지 3만에 지나지 않는 오나라 군대의 공격에 수비 태세로 나가게 된 것일까?

실제로는 공격하려고 해도 공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조조군은 출정한 후로 이미 수개월이 지난 상태였다. 익숙하지 않은 기후와 뱃길을 통한 긴 여정때문에 완전히 지쳐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군사들 사이에 전염병이 많이 퍼져 있었고, 믿고 있었던 형주의 수군이 전의를 상실하여 믿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배의 앞과 끝을 서로 연결하여 장기전으로 전쟁에 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전법은 항상 공격에 대한 방어로는 훌륭하지만, 불을 이용한 공격에는 약하다. 이것은 조조도 물론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쨋든 계절이 겨울이었기 때문에 설마 동남풍(혹은 남풍)이 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것이다. 그러나 오나라 주유의 수군은 이 일대 지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불을 이용한 계략'의 가능성을 미리 점쳐보고, 흔치않은 기회를 성공시킨 것이다.

같은 해 7월, 한 왕시의 승상이 된 조조는 대군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유표가 망한 후의 형주를 순식간에 제압하여 유비를 무너뜨리는 등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어다. 그렇지만 이 쾌속 진격도 이미 한계를 맞아 공세도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조조는 그답지않게 이런것을 판별하지 못했고, 강가에서의 수상전에서와 같이 적의 함정에 빠진 것도 역시 경솔했다는 비난을 면할 수는 없었다.

조조에게 있어서 천하통일이라는 야망을 사실상 단념시키게한 실로 중요한 패전이 바로 이 적벽대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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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삼국지 - 검각 전투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21:04

검각 (劍閣)

검각 (劍閣)

검각(劍閣)


촉이 마지막으로 치룬 전투입니다. 마지막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허무한 감도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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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각은 익주 재동군 한덕현에 있었으며, 잔도와 관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현재는 사천성 검각현 북쪽에 위치해 있다.

경요 6년(263)에 강유가 유선에게 표를 올렸다.

「듣건대, 종회는 관중에서 병사들을 훈련시켜 우리를 공격하여 취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응당 장익과 요화를 보내 각 군대를 지휘하여 양안관구(陽安關口)와 음평교두(陰平橋頭)로 나누어 지키도록 하여 미연에 방지해야만 합니다.」

황호는 귀신이나 미신의 말을 신용하고, 적군은 끝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여 우선에게 이 일을 진행시키지 말라고 했다. 신하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종회가 낙곡으로 향하고, 등애가 답중으로 진입한 연후에 비로소 우거기(右車騎) 요화를 답중으로 보내 강유의 원군이 되도록 했으며, 좌거기 장익과 보국대장군 동궐(童厥) 등은 양안관구로 가서 여러 진영의 밖에서 지원부대가 되도록 했다. 음평까지 왔을 때, 위나라 대장 제갈서가 건위(建威)로 향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므로 정지하고 그들을 기다렸다. 한 달 남짓 후, 강유는 등애에게 격파되어 음평으로 돌아와 주둔했다.

종회가 한,악 두 성을 공격하며 포위하고, 따로 장수를 보내 관구(關口;안양관구)로 진격하도록 하였으므로, 장서(蔣舒)는 성을 열고 나와 항복했고, 부첨(傅僉)은 저항하다 전사했다. 종회는 낙성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킬 수 없었는데, 관구가 이미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자 계속 달려 진격했다. 장익과 동궐이 한수에 도착하자, 강유와 요화 또한 음평을 버리고 후퇴했고, 마침 장익,동궐과 회합하여 모두 검각(劍閣)으로 물러나 지키며 종회에게 저항했다. 종회가 강유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공후(公侯)께서는 문무(文武)의 덕에 의지하고, 가슴속에는 세상을 덮을 지략이 있어 파촉,한중에서 공을 세워 명성이 전국에 퍼져, 먼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간에 당신에게 돌아가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항상 과거로 생각을 달려 일찍이 커다란 교화에 마음을 같이 했습니다. 오나라 계찰(季札)과 정나라의 자산(子産)은 그것으 좋은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강유는 답장을 하지 않고 진영을 배열하여 요새를 지켰다. 종회는 함락시킬 수 없었으며, 식량 운송하는 곳이 멀었으므로 장수들과 상의하여돌아갔다.

등애는 음평으로부터 경곡도(景谷道) 옆을 지나 촉 땅으로 침입하여,마침내 면죽에서 제갈첨을 격파시켰다. 유선이 등애에게 항복을 요청하였고, 등애는 진군하여 성도를 점거했다. 강유 등이 제갈첨이 패했다는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떤 사람은 유선이 성도를 굳게 지키려 한다고 들었고, 어떤 사람은 동쪽의 오로 들어가려 한다고 들었으며, 어떤 사람은 남쪽의 건녕으로 들어가려 한다고 들었다.그래서 강유는 군대를 이끌고 광한,처로부터 나아가 허실을 살폈다. 오래지 않아 유선의 칙령을 받고 곧 무기를 놓았다.

<정사삼국지>"강유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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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삼국지 - 이릉 전투
ⓞ2ⓦ TALK TALK!/○○⑦ 역사TALK | 2008.06.15 20:01

백제성

유비가 이릉전투에서 대패한 후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주둔했던 백제성

유비가 이릉전투에서 대패한 후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주둔했던 백제성

이 전투로 촉이 쇠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실제로 이릉전투에서 촉이 패배한 후 유비가 죽은 후, 남방에서는 맹획, 옹개 등이 반란을 일으켰고 북벌은 번번히 실패했으며 제갈량이 죽은 후에는 강유의 잦은 북벌과 정치적인 혼란으로 촉은 패망했습니다. 아래는 이릉전투에 대한 글을 발췌해 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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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권이 관우를 참수하고 형주를 빼앗자 유비는 크게 노하여 제갈량의 만류를 뿌리치고 몸소 대군을 이끌고 손권을 토벌하러 원정길에 오른다. 한편 장비는 원정을 준비하고 있을 때 장달(張達) 범강(范疆)에게 암살당한다.

- "유비가 오나라를 토벌할 때, 장비는 만 명의 병사들을 인솔하여 낭중으로부터 나와 강중에서 유비와 만나기로 했다. 출발하려고 할 때, 그의 막하의 장수 장달(張達) 범강(范疆)이 장비를 살해하고, 그의 머리를 갖고 장강을 따라 손권에게로 달려갔다." <정사삼국지>"장비전" 중에서 -

거기장군 장비가 측근에게 살해되었다. 당초, 유비는 손권이 관우를 습격한 일에 분노하여 동쪽 정벌에 나서려고 했었다. 가을 7월에 군사들을 인솔하여 오를 토벌했다. 손권이 편지를 보내 화해를 요청했지만, 유비는 격노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오나라 장군 육의(陸議) 이이(李異) 유아(劉阿)등은 무현(巫縣) 자귀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유계의 장군 오반(吳班) 풍습(馮習)이 무현으로부터 이이 등을 공격하여 격파시키고, 군대를 자귀현에 주둔시켰다. 무릉(武陵) 오계(五稽)의 만족이 사자를 보내 병사를 요청했다.

2년(222) 봄 정월에 유비의 군대는 자귀현으로 돌아왔고, 장군 오반 진식(陳式)의 수군이 이릉(夷陵)에 주둔했으며, 장강 동서쪽 해안에 진영을 설치했다. 유비는 자귀현으로부터 장군들을 인솔하여 진군해 산을 따라 고개를 넘어 이도(夷道)의 효정에 진영을 두었다.흔산(痕山)으로부터 무릉을 지나서 시중 마량(馬良)을 보내 오개의 만족을 위로하도록 했으므로, 만족은 모두 서로 이어서 호응하여 행동을 일으켰다. 진북장군 황권(黃權)이 강북의 군대들을 통솔하여 이릉도에서 오나라 군대와 서로 대치했다.

여름 6월, 자귀현으로부처 10여 리즘 되는 곳에 황색 기운이 나타났는데, 넓이가 수십 장이나 되었다. 그후 10여 일 있다가 육의(陸議)가 효정에서 유비의 군대를 크게격파시켰으며, 장군 풍습 장남(張南)등은 모두 전사했다. 유비는 효정으로부터 자귀로 돌아와 흩어졌던 병사들을 모아서 배를 버리고 육로로 어복(魚復)으로 돌아왔다.어복현을 바꾸어 영안(永安)이라고 부렀다. 오나라는 장군 이이 유아 등을 파견하여유비의 군대를 추격하고 남산(南山)에 주둔했다.

가을 8월에 유비는 병사를 모아 무현으로 돌아왔다. 사도 허정이 죽었다.

겨울 10월에 승상 제갈양에게 조서를 내려 성도(成都)에 남교(南郊 : 동짓날 하늘에제사지냄) 북교(北郊 : 하짓날 땅에 제사지냄)의 제단을 세우도록 했다. 손권은 유비가 백제성(白帝城)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며 사자를 보내 화해를 요청했다. 유비는 그것을 허락하고 태중대부(太中大夫) 종위(宗瑋)를 보내 이 일을 완결짓고 돌아오도록 했다.

겨울 12월에 한가(漢嘉)태수 황원(黃元)은 유비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 병사를 일으켜 저항했다.

3년(223) 봄 2월에 승상 제갈양이 성도에서 영안으로 왔다. 3월, 황원이 병사를 진군시켜 임공현(臨攻縣)을 공격했다. 유비는 장군 진홀(陳忽)을 파견하여 황원을 토벌하도록 했다. 황원의 군대는 패하고 장강을 따라 내려갔다. 황원은 자신의 호위병에게 결박당하여 그대로 성도로 보내졌으며 참수되었다.

유비는 질병이 심해지자, 승상 제갈양에게 아들을 부탁하고 상서령 이엄(李嚴)에게 보좌하도록 했다.

광무 3년(223) 여름 4월 계사일, 유비는 영안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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